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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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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그러나 비판적인 글을 읽을 때면, 무조건 부정적인 감정에만 매몰되지는 않는다. 더불어 이 책에서 정의내리고 있는 “비판”의 개념이 대상에 대한 극복 요소를 발견하고자 함임으로 이해했을 때는 그 반감이 훨씬 더 덜해졌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신화적 이데올로기부터 대중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순 덩어리들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입장에서 비추어 보았을 때는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원서가 현재의 예견된 모습을 낱낱이 낭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계몽이 그런 힘까지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내가 소름이 끼치고, 잠시 생각을 차분히 해야 했던 독서의 순간들 두 가지 정도를 이번 에세이에서는 공유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순간,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따르지 않으려는 것은 계몽에게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왜 자연 세계를 추상화하고 쪼개고 분해해서 계산 가능한 것을 만드는 걸까요? 지배하기 위해서죠. 왜 그걸 지배하고 싶을까요? 자연 세계에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외적 대상과 외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수량화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계몽의 또 다른 원리는 주체로의 환원입니다."]


인간들의 다양한 지배 욕심이 어디에서부터 비롯 되었나 싶을 찰나에 이 대목에 내 머리가 한 대를 심하게 맞았다. 특히 우리가 지배할 수 없고,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느껴질 경우에는 더욱이 수량화하고 우리가 아는 언어로 환원하려고 하는 현상들이 내 머릿속에서 하나씩 꺼내져 나왔다. 마치 토하듯이 역겨웠고 인간의 한계를 소름끼치게 반증하고 있는 것 같아 머릿 속이 어지럽기까지 했다.


계몽은 바로 깨어 다시 서는 것이 아닌, 인간의 영역 안으로 흡수시키려 하는 것. 모자란 지식으로 읽은 책이지만, 내가 이해한 대로라면 왜 그렇게 아도르노가 칸트를 싫어했는지 공감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이성과 도덕의 기준을 인간의 계몽과 연관시킨다면 이는 당연히 인간은 고품격의 생물체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과 언행은 지배를 위해 존재한다는 무서운 이야기로도 연결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두 번째 순간,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진다는”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적인 주체의 논리 아닌가요. 그리고 자신이 겪는 불안정, 불평등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게 되고 그 결과 번아웃과 자존감 결여가 만성적으로 따라붙게 됩니다. 고립된 개인들은 서로 연대하지 못하고 타자에 대한 혐오 정서에 빠집니다. 그러나 타자 혐오는 결국 자기 혐오의 귀결인 것입니다. 자기 보존이 자기 부정과 자기희생으로 귀결되는 매커니즘이 이런 맥락에서도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보존하고 이어가 자신을 어필하는 세대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보존을 하기 위해 일을 하고, 새로운 활동을 개척해 나가기도 하는데, 자기 보존이라는 부분에서 내가 왜 그렇게까지 바쁘고 힘들게 그리고 무언가를 미치도록 몰입해서 실행하는지에 대한 동기가 분명해 졌다. 불안정과 불평등을 나 스스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이 늘 내 어깨를 누르고 있다보니 잘못 힘을 주었을 때, 나만의 싱크홀로 빨려 들어가게 될 확률이 높아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싶다.


이것 외에도 <계몽의 변증법>이 나에게 예언서처럼 다가오는 순간들이 될 지 몰랐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으면 소름이 끼칠만큼 새로운 국면들이 또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다.


원서를 읽어보러 잠시 여행을 떠나야겠다.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확실히 철학은 적용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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