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의 초입, 국립극장에서 조선으로의 시간이 열렸다. 국립무용단의 신작인 「미인」이 선보여지는 자리였다.
국립무용단은 이전부터 전통에 현대를 멋입히는 시도를 꾸준히 해 왔다. 「묵향」이나 「향연」에서 그들은 한국의 사계절에 집중했다. 한국춤을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각각 담아내며 한 폭의 명화를 펼쳐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무용단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달리 '한국적인' 공연이 준비됐다.
이번 공연에서는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부터 영화·연극·뮤지컬 등 다양한 무대에서 감각적인 연출을 선보이고 있는 국가대표 연출가 양정웅과 Mnet '스테이지 파이터' 한국무용 코치이자 안무 감독, 안무가인 정보경이 함께 했다. 그녀는 한국춤에 내재된 매혹적인 섬세함과 강렬한 에너지를 여성 무용수들 고유의 춤 선과 고고한 품격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한국의 멋과 흥이 담긴 10여 개의 민속춤(부채춤·탈춤·칼춤·복춤·강강술래·놋다리밟기 등)이 마치 조각보처럼 펼쳐지며 관객들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감각적인 음악의 경우, 영화·드라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범 내려온다'로 유명한 팝 밴드 '이날치'의 소속이기도 한 장영규가 작곡했다. 음악 덕분에 때로는 날카롭게 신경을 집중시키기도 했고, 때로는 절로 흥이 나서 몸을 들썩거리기도 했다. 이렇게 온도는 다채로웠지만 기본적으로는 한국인의 '얼'이 담겨있어서 조선으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저잣거리에서 신명 나는 탈춤을 구경하는 양반이 된 것만 같았다.
또한,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미인」의 의상·오브제디자인과 무대디자인이다.
의상이나 오브제 디자인의 경우 '보그 코리아'에서 30년간 패션 화보 디렉터로 활동하며 코리아니즘(Koreanism)의 아이콘이 된 서영희가 맡았다. 그녀는 한국의 정체성이 녹아든 하이엔드 미장센을 세련되게 선보였다. 사실 이번 공연은 그녀에게 도전이기도 했다. 서영희 디자이너는 항상 멈춰 서 있는 모델들을 대상으로 옷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무용수의 맞는 옷을 입히는 것은 과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하며 돌파구를 찾았다. 가령, 부채춤에서 부챗살은 한복 치마의 세로 주름으로 표현했다. 탈춤에서 파격적으로 탈을 없애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승무의 고깔에 LED 전구를 다는 등 신선한 시도를 하며 공연의 독특함을 더했다. 그러한 시도들은 패션쇼처럼 강렬하게 다가오면서도 공연과 이질적이지 않게 어우러졌다.
무대디자인의 경우 아트디렉터 신호승이 참여했다. 그는 K-POP 그룹 에스파·아이브 등의 뮤직비디오를 작업하였으며, 광고신에서 센세이셔널한 비주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에 공연장을 찾아서 직접 감상하고 느낀 점은, 무대의 디자인이 굉장히 직관적이면서도 세련됐다는 것이다. 세 개의 세모와 가려진 동그라미는 자연스럽게 조선의 어느 밤을 연상시킨다. 현대의 밤과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영원히 경험할 수 없을 당시의 야간(夜間)을 간단한 공식을 통해 장엄하게 표현했다. 도형을 단순히 확대하여 압도감을 유발한 것이다.
이후에도 무대디자인은 미니멀한 구조를 띠며 마치 '현대미술'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특히 허공에 반투명한 네모 상자를 띄워두었던 부분이 그랬다.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 덕분에 여느 갤러리의 작품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용수는 안개 뒤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는 무용수들에 대한 극찬을 남기고 싶다. 앞서 말했듯, 이번 공연에서는 여성 무용수들만이 출연했다. 그리고 29명의 출연진 전원이 국립무용단 소속 무용수였다.
초반에 그녀들은 옷고름을 늘어뜨리고 붉은 댕기로 머리를 묶어서 신윤복의 '미인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이어지는 민속춤에서 역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여성성을 새로운 '미인'으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후반부에서는 여성들이 직접 남성 소리꾼의 모습으로 남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인의 미(美)가 느껴지는 담긴 전통적 여성상을 기꺼이 보여주다가도 고리타분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새롭게 나아가는 모습은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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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2025년 4월 3일부터 6일까지 쉬지 않고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이미 끝나버린 공연이다. 무용 공연의 특성상 언제 다시 이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관람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못하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미 끝나버린 공연에 대한 후기를 쓴 이유는 '국립무용단'이 추구하는 방향이 너무도 마음에 와닿기 때문이다. 그들의 색은 뚜렷하고, 또 역동적이다. 전통적인 형식미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투지가 보인다.
그래서 국립무용단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함께 걷자고 권유하고 싶다. 물론 이번 공연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를 냈지만, 더욱 인기가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팬의 심정이다. 국립무용단이 보여줄 다음 공연에서 피 터지는 티켓팅이 이루어진다면 표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풍족해질 것 같다.
그럼 이제, 국립무용단이 보여줄 다음 조선에서 우연히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