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서울,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알폰스 무하의 탄생 165주년을 기념하여 [아르누보의 꽃:알폰스 무하 원화전]이 개막했다. 알폰스 무하의 원화전은 2016년 12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이후 약 8년만이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아버지라고 불리울 정도로 현대 일러스트레이션 표현 기법에 큰 영향을 미친 알폰스 무하의 명성은 내가 처음 타블렛 펜을 들었던 초등학생 때부터 익히 들었으나, 그의 원화를 볼 수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나는 기대가 부푼 마음을 안고 강남으로 향했다.
전시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평일 오전임에도 꽤나 붐볐고, 마침 도슨트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평소 도슨트를 즐겨 듣지는 않기에 그들이 함께 전시를 살펴보는 시간에 함께 하지는 않았으나 언뜻 들려온 알폰스 무하의 탄생은 실로 극적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어머니 아말리에 말라는 독신주의자였으나 어느날 꿈에서 천사가 그녀에게 세 아이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 결혼 중매 편지가 왔고,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여긴 아말리에 말라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은 채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렇게 결혼한 것이 아이 셋이 딸린 온드르제이 무하, 알폰스 무하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와의 결혼에서 선물처럼 얻은 것이 바로 알폰스 무하였다.
첫 번째 구원, 쿠헨 벨라시 백작과 두 번째 구원, 사라 베르나르
마치 신화, 혹은 설화와도 같은 그의 탄생을 들은 나는 속으로 경이감을 느끼며 전시를 살펴보았다. 전시는 총 네 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져 알폰스 무하의 생애를 돌아보고 있었다. 첫 번째 섹션에 들어가기 전, 전시 서문 옆에는 간단하게 알폰스 무하가 처음 미술을 걷게 된 순간이 적혀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미술을 가까이 하였으나 막상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된 것은 그가 25살이 되던 해였다. 그 전까지 그는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공방에 취업해 무대 배경그림 등을 그리는 일을 하였는데, 이후 그를 눈 여겨본 백작의 후원을 받으며 처음으로 그림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알폰스 무하에게 백작과의 만남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그는 오직 '일 년에 작품 한 점을 완성할 것'이라는 조건 외에는 그 어떠한 조건도 들지 않고 알폰스 무하의 작품 활동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가 원하는 미술원에 다니게 해주고, 아카데미가 마음에 안든다고 하면 아카데미를 옮겨주기도 했다. 약 6년에서 7년 가까운 시간동안 그는 알폰스 무하의 지지대가 되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후원을 끊게 된 것은 후대들에게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후원의 조건에서 '알폰스 무하가 1년 동안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끊었음을 추측할 수 있으나, 알폰스 무하가 이후 작품 활동을 하며 보여주었던 성실함을 확인한다면 그에게 1년간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다는 것은 꽤나 의아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이유로 후원은 끊겼고, 알폰스 무하는 쿠헨 벨라시 백작의 도움으로 쌓아온 그림 실력으로 파리에서 인기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약 4년간 조용히, 그러나 착실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알폰스 무하에게 두 번째 구원이 찾아온다. 그날은 1894년 겨울의 크리스마스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말을 기념하며 휴식을 즐기던 그 시각, 무하는 한 친구의 부탁을 받고 파리의 한 인쇄소에 남아 있었다. 그 인쇄소는 당대 최고의 배우로 손꼽히던 사라 베르나르의 신작 연극 포스터를 제작 중이었으나, 마감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도 여전히 완성본을 내지 못한 상태였다. 초조해진 인쇄소 측은 어쩔 수 없이, 마침 그림을 그릴 줄 알던 무하에게 도움을 청한다.
무하가 맡게 된 연극은 바로 [지스몬다]였다. 그는 단 며칠 만에 전례 없는 세로형 대형 포스터를 완성했고, 이 독창적인 스타일은 파리 거리 곳곳에 내걸리는 순간 단숨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하 스타일'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전환점이 된 이 포스터는 무하를 하루아침에 스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운명적인 작업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라 베르나르는 이 포스터에 깊은 감명을 받아 무하와 6년간의 전속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무하의 인생에 있어, 그것은 단순한 성공 이상의 의미였다. 그에게 두 번째로 찾아온 구원, 혹은 예술가로서의 탄생이었다.
이번 전시 [알폰스 무하 원화전: 아르누보의 꽃]의 첫 번째 섹션, [뮤즈가 건넨 붓, 화가가 그린 전설]은 사라 베르나르와의 협업을 중심으로 무하의 이름이 어떻게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는지를 다루며, 관람객을 전시의 시작을 알린다.
그의 작품을 원화로 만난다는 것
요즘 웹툰을 보다 보면,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배경에 꽃이 피어나듯 장식적인 요소들이 스며드는 걸 자주 보게 된다. 꽃잎이 흩날리고, 섬세한 패턴이 인물을 감싸며 마치 그 사람이 이 세계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부각되는 연출은 해당 등장인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강조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다. 이처럼 미인을 강조하기 위한 시각적 연출, 그 배경에 알폰스 무하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면 그의 그림이 오늘날 우리의 시각문화에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알폰스 무하는 여성 인물을 단순한 ‘모델’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여성을 중심에 두고, 그녀를 둘러싼 세계를 꽃과 식물, 유기적인 곡선들로 가득 채워넣었다. 마치 한 인물이 하나의 세계이자 신화인 것처럼 말이다. 그가 그려낸 여성들은 신비롭고 초월적인 존재로 떠올랐고, 그 이미지들은 시대를 건너 지금의 로맨스 판타지, 웹툰, 게임 아트 속에서 보다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림이란 고상한 취미이자, 누군가를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수단에 가까웠다. 그러나 알폰스 무하는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무너뜨려 예술이 얼마나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 수 있었는지를 강조한다. 연극 포스터, 담배 상자, 과자 광고까지 무하의 그림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브랜딩’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던 시대에서조차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한 브랜딩'을 이뤄내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을 ‘원화’로 마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장의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는 경험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미감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일이며, 이미지가 어떻게 사람들의 감각과 일상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 대부분은 포스터와 판화 위주이기에, 회화적인 붓터치를 생생히 느끼기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쇄물이라는 대량 생산 가능한 형식을 통해, 무하가 어떻게 예술성과 대중성을 조화시켰는지, 또 한 장의 포스터가 어떻게 한 시대의 미감을 정의했는지, 어떻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