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다섯 사람이 있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비평을 좋아하는 사람. 이들의 행동반경은 종종 엇갈린다. 누군가가 영화관에 있을 때 누군가는 전시회장에, 누군가는 서점에 있으니까.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 흠뻑 빠지기 시작한다. 의자에 앉아 독서대를 펴고 그 위에 전문 서적을 얹는다. 정신적인 고양에 흥분하다가도 자신의 무지에 절망하길 반복하던 그들은 모두 한 사람 앞에 멈춰 선다. 관심사가 제각각인 사람들이 한 번쯤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인물.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글은 ‘그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이라고. ¹
좋은 글은 ‘그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백과사전이나 요리법처럼 어떤 정보를 알려주는 글을 보고 글쓴이가 궁금하지는 않잖아요. 촘촘한 논리나 멋진 표현이 아닌, 글 속에 글쓴이의 목소리와 체온이 담긴 글을 만나면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지죠. 살아오면서 한 가지 일만 했다면 어떻게 그리 뚝심 있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버텨왔는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리 다양한 경험 속에서 자신을 지켜왔는지, 뭘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이라면 그 방황의 냄새와 깊이가 궁금합니다. 확고한 글보다는 흔들리는 글, 배회하는 글, 찾아 헤매는 글, 삶의 두께가 느껴지는 글을 쓴 사람이 보고 싶더군요.
내게 벤야민은 그런 인물이었다. "영화는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스튜디오의 밖에서 '유명 인물'이라는 인위적 스타를 만들어낸다"²고 선언하는 글을 읽으면 자연스레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이 호기심은 "삶의 두께가 느껴지는 글"뿐만 아니라 지독히도 어려운 글을 읽을 때도 튀어나왔다. 읽고 있던 이론서나 비평이 너무 어려우면 저자가 쓴 문학 작품이나 일기로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느슨하면서도 솔직한 문체로 한 인간을 파악하고 나면 이론서나 비평의 딱딱한 문장을 누군가의 목소리로 느낄 수 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벤야민이 쓴 소설, 꿈, 설화 등을 모은 문학작품집 <고독의 이야기들> 출판 소식이 유독 반가웠다. 그의 문학 세계를 알면 다른 세계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라도 닿고 싶을 만큼 그의 세계는 특별해 보였으니까.
책 <고독의 이야기들>엔 마흔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야기는 크게 꿈과 몽상, 여행, 놀이와 교육론으로 나뉜다. 단편마다 벤야민이 사랑한 모더니즘 예술가인 파울 클레의 회화 작품이 수록돼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벤야민 읽기를 놀라운 방식으로 재조정할 선물 같은 책"이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이 책은 일반적인 문학작품집과는 다르다. 상징을 찾아내고 해석하려는 행위는 자꾸만 미끄러졌고, 단편에서 하나의 완결된 인간상을 추출하려는 시도는 절망됐다. 벤야민은 기존과 다른 글을 쓰려했고, 그 글을 읽으려면 기존과 다른 독법이 필요했다. 관습적인 읽기로는 비관습적인 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없으니까.
정답을 찾으려는 시각을 내려놓으니 그제야 한 인간이 보였다. 기차에서 독서를 즐기는 한 평범한 인간이.
승객이 기차 객실에서 집에 있는 장서를 가져와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는 기차에 오르기 직전에 눈에 띄는 책을 구입한다. 승객은 오래전에 준비한 책이 매력적일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데, 그게 또 맞는 생각이다. 더욱이 승객은 형형색색의 삼각기들이 걸린 승강장 도서 부스에서 책을 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략) 독서의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철도의 신들이 마음에 들어 할 뭔가를 하고 있다는 애매모호한 기분을 느끼며 그 펄럭이는 책들을 향해 손을 뻗어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지 않을까. - 책 <고독의 이야기들> 162쪽
그런데 또 여행이 독자에게 제공하지 않는 것이 있기는 있을까? 독자가 독서에 그렇게 몰입하는 때가 여행할 말고 또 있을까? 독자 스스로 자기 삶이 책 속 주인공의 삶에 섞여 들어가 있음을 그렇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때가 여행할 때 말고 또 있을까? - 책 <고독의 이야기들> 165쪽
실제로 혹독한 망명 생활을 했던 벤야민에게 기차 여행과 독서는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였다. 망명의 경험 때문일까, 그의 단편엔 외지인이 자주 등장한다. 단편 <고독의 이야기들>에서도 그렇다. 시골길을 걷던 주인공은 나무 사이에서 어떤 불빛을 발견하고는 생각한다. "매일 저녁 저 불빛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저 불빛은 아무것도 알려주는 게 없을 거야. 등대 불빛일 수도 있고, 농장 불빛일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외지인인 나에게는 저 불빛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군." 그러나 나중에 주인공은 깨닫는다. "먼 나무들 위로 천천히 떠오른 것이 달이었다는 것, 내가 눈여겨보았던 지상의 불빛은 달빛이었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벤야민의 문학 작품들은 흔들린다. 배회한다. 찾아 헤맨다. 확고한 어조의 비평과는 다르다. 바로 이 점에서, 벤야민은 독자가 그를 보고 싶어하게 만든다. 이런 독자들이 계속 있다면 벤야민은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¹ 김진해. (2022.10.30.). "주인이 궁금해지는 ‘힘 뺀’ 글쓰기". 한겨레21.
² 벤야민, W. (2007). 복제기술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벤야민 선집 2.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