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7세 고시라는 말이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어 교육열 높은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곳곳에서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다. 7세 고시란 대치동을 위시한 서울의 지역들을 중심으로 각종 유명 학원에서 응시 가능한 레벨테스트를 일컫는 용어로, 만 5~6세 아이들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학원 건물로 들어가 이유도 목적도 알지 못한 채로 통과해야만 하는 하나의 관문이 되었다. 이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영어유치원의 확산과 더불어 사회구조적 문제로 지적받아온 대한민국 교육의 다양한 문제들과 맞닿아있고, 이 역시 다소 충격적이기는 하나 현재 진행 중 과정일 뿐이다.
만 5~6세 아이들이 제한 시간 내에 풀어내야 하는 테스트의 실제 문제들을 확인해보면 어떻게 생각해도 기괴하다. 발달 수준에 전혀 맞지 않는 문제를 아이 앞에 놓아두고 어떻게든 풀어내야만 한다고 아이를 독려할 때, 결국 아이가 풀어내야 하는 것은 부모다. 부모는 아이가 생기는 순간부터 양육 과정에서의 갖은 문제들을 직면하고 자신들이 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이에게도 전혀 다르지 않은 층위의 문제로 다가온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많은 아이들은 유년기부터 부모의 존재를 평생에 걸쳐 풀어내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고 살아간다. 부모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바깥으로 확장하지 못한다.
나는 그 시절에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나는 만화를 아주 좋아했던 아이였다.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은 자연스럽게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틈만 나면 만화를 보려고 해서 어머니께 종종 꾸중도 들었던 것 같다. <톰과 제리>나 <짱구는 못말려>를 좋아해서 이미 한번 봤던 에피소드를 여러 번 돌려보기도 했는데, 특히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 중 서너 개는 그 이상으로 많이 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에 봤던 작품의 내용 자체는 시간이 지나며 매우 흐릿해졌지만 그 작품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넘어 나만의 상상을 펼쳤던 기억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무언가를 추억한다는 것은 사유를 통해 사물을 파고들어간 내재화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언가를 경험한 뒤 새롭게 상상하는 일도 즐거운 것이지만 과거의 경험 속에 잠들어있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일 역시 즐거운 순간이 된다. 이번 <지브리 페스티벌>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들, 이를테면 내가 잃어버렸던 상상과 타인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상상을 두 갈래로 나누어 살펴보자.
<루이 랑베르>
열두 살이 되던 해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여, 상상력을 한없이 발달시켰다. 그가 독서를 통해 인식한 사물의 개념이 하도 정확하여, 실제로 그 사물을 보았다 할지라도 독서를 통해 그의 영혼에 각인된 영상만큼 생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유츄법을 쓰거나 일종의 투시력을 가지고 자연을 이해하는 듯했다.
발자크의 소설 <루이 랑베르>의 주인공인 루이에 대한 위의 묘사를 살펴보면 우선 <이웃집 토토로>가 가슴속에 떠오르게 된다. 그건 <이웃집 토토로>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자연을 직접 관찰하지 않고도 자연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어주었기 때문이고 아이들의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데 있어서 자연과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공연 1부에서 <이웃집 토토로>의 OST는 프란츠 리스트와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과 만나 아름다운 하나의 선율이 되는데, 특히 드뷔시가 자신의 곡을 '자연과 상상력 간의 대화'로 해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음악이 작품의 이야기와 함께 얽혀들어 관객으로 하여금 보다 심화된 감상을 가능케 하고 나아가 다양한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모두가 랑베르와 같은 상상력을 가지고 성장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상상력이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어야 하고 그것이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귀한 것이다. 7세 고시를 아동 학대로 바라보는 관점은 비단 그것이 아이의 발달 수준에 맞지 않는 문제들을 풀게끔 강요함으로써 신체적,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뿐만 아니라 기실 부모가 자발적으로 아이의 상상력을 억제하고 자연과 강제로 분리된 삶을 살게 만든다는 측면에 더욱 가까이 위치해야 한다.
그렇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경우는 어떨까. 자연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저마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해서 자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또래 아이들처럼 아무것도 안 하면서 빈둥거리는, 누구한테나 유혹적인 무위도식에 빠지는 대신, 그는 아침 일찍부터 빵과 책을 챙겨서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책도 읽고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아들이 공부만 하는 것이 어머니의 눈에는 몹시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어머니들의 놀라운 직관이란! (...)
"원하기만 하면 나는 언제든 내 눈에 쓰인 장막을 걷어낼 수 있어. 그러고 나면 갑자기 나의 자아에 몰입하게 되고, 내 안에 있는 어두컴컴한 방을 발견하게 돼. 그 속에서는 자연현상이 매우 순수한 형태로 재현되지. 외부 감각에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한 형태로 말이야." 루이는 소중한 기억에 독특함을 부여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이렇게 말했다.
7세 고시를 비롯한 수많은 비상식적 용어들의 범람 속에서 오늘날 부모들에게 그러한 직관은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그들은 돼지로 변한 치히로의 부모처럼 게걸스럽게 아이들의 상상력을 먹어치우고 있다. '내 눈에 쓰인 장막'은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상이하겠지만 7세 고시를 치르는 아이들의 경우 그것은 부모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부모를 눈에서 걷어내라는 것은 물론 마찬가지 맥락에서 과도한 요구가 되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자아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불가피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OST '언제나 몇 번이라도'는 안토니오 비발디 스타일의 편곡을 거쳐 연주되었는데, 비발디의 경우 그의 음악은 자연의 변화를 음악으로 아름답게 표현함과 동시에 그 변화 속에서도 일관되게 확인 가능한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연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무엇이 변하고 또 변하지 않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사상>
루소는 자연에 의해서 아동을 교육하고 나아가 아동의 개성을 존중하며 아동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교육을 하는 것이 올바른 교육의 시발점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인간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자연적인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인간의 고귀한 자유와 천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의한 교육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 루소가 말하고 있는 자연의 교육이란 인위적이고 과장된 것이 아닌 어떤 강요나 간섭도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성장을 의미하며 유아기 때 행복, 자발성,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라고 했다.
- 이숙이.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사상 : 현대 아동교육에의 시사점을 중심으로 (2006) : 145-147.
이처럼 아동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한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사상은 앞서 언급한 루이 랑베르의 인간상과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생태학적 메세지와도 연결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같은 지브리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 인위적인 요소로부터 나오는 위화감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가 작품에 온전히 몰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는 했는데,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개별 작품들이 그 자체로 120~130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 하나의 온전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는 성장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모든 부분에서 변화를 겪지만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아이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시기에 해당하는 하나의 온전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설사 아이가 천재성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적절한 시기에 알아서 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브리 페스티벌>의 2부가 지브리 오리지널 OST만으로 구성되어 차례로 연주되었던 것은 내게 있어서 아이 한 명 한 명을 만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내가 어릴 적 만났던 아이를 아주 오랜 시간 잊고 살다가 어떤 추억과, 어떤 향수와 함께 불현듯 재회한 듯한.
사실 요즘의 어린아이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세상이 내가 지금은 기억조차 흐릿한 마음으로 보냈던 세상과 얼마나 다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지브리 페스티벌>과 같은 공연을 보며 자신이 봤던 작품들은 무엇이고 그에 대한 감상은 무엇이며 부모와 함께 공연을 관람한 기분이 어땠는지를 이야기할 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루소에 의하면 아동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의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은, 비록 부모의 교육방식의 편차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7세 고시와 같은 사회 현상의 중심에 서 있는 부모들의 경우에는 변화가 불가피하다. 물론 인간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자연적인 감정과 인간의 고귀한 자유와 천성 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부모이기 이전에 사회가 되겠지만 사회가 변하지 않는다면 부모라도 변해야 할 것이다. 어떤 부모의 모습으로 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모든 작품들은 더는 아이만을 위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아이들의 상상력은 작품들 속 주인공들의 그것과 함께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