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찾아오는 어느 날, 성수를 방문했다. 성수동 길목의 작은 갤러리에서 열리는 아트인사이트의 첫 번째 기획전, <틔움>을 보기 위함이었다.
봄을 맞아 따뜻하고, 새싹들이 하나둘 돋아나는 바깥의 풍경과 '틔움'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거리의 활기와 대조적으로, 갤러리 안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그 조용한 공간에서, 다섯 작가의 세계를 마주했다.
기획전의 이름처럼, 이 전시는 무언가가 자라나는 때, 그 사이의 잠깐 멈추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마음속에 품었던 작은 의문이나 호기심, 감정의 싹을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그 씨앗들을 들여다보거나 돌볼 여유 없이, 우리는 자꾸만 다음 일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돌보지 못한 감정들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기획전의 소개 글을 인용해 보면, '억지로 삼킨 알약처럼 명치쯤에 걸려 오래 남는다."
그런 감정의 조각들을 조용히 꺼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이 전시와 같은 순간들이지 않을까. <틔움>은 다섯 명의 작가가 일상에서 포착해 낸 순간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씨앗을 틔워낸 결과이다.
예술에는 언제나 작가 개인의 감정과 세계가 녹아들어 있다. 이 전시에서는 그런 각자의 세계가 어떤 모양으로 피어나는지,나 또한 잠시 멈춰서서 조용히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대성 작가의 작품이었다. 귀엽고 톡톡 튀는 분위기의 색채들이 눈길을 끌었다. 사회적 이슈를 풍자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작가만의 재미있는 요소와 상상을 곁들여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재미있는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이 작품의 이야기는 어떤 것일지 상상해 보게 되었다.
유사사 작가의 작품에서는 섬세하고 화려한 선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섬세하게 그려진 몽환적인 이미지를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Mia 작가의 작품 중에는 'The Blue : Bench'가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다. 일반적인 그림책처럼 순서를 따라가는 대신, 이 작품은 관객이 직접 문을 열듯 페이지를 펼쳐, 자유롭게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도록 한다. 잠깐 이 작은 책을 펼쳐보며 상상에 빠져보는 순간이 즐거웠다.
은유 작가의 작품에서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들이 펼쳐진다. 어딘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장소들이지만, 동시에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작가 특유의 색채와 시선으로 비추어진 장소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상상하게 했다.
나른 작가의 작품은 인물 중심의 감정이 돋보인다. 인물들의 감정을 작품의 분위기, 이미지로 상상해 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특히 연애와 사랑의 감정, 그리고 그 안의 쓸쓸함과 고요한 외로움이 여운처럼 남는다.
전시의 마지막에서, 기획전의 소개 글에서 한 문장이 떠오른다.
"각자의 속도를 잠시 늦추어 당장의 맥을 짚어볼 때 저마다의 정서는 외롭지만 필연적이고, 침체된 동시에 희망적이다. 어떠한 결론이나 특정한 어휘로는 정의내릴 수 없을뿐더러, 그럴 이유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뭉툭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 감정들이 갈망하는 것은 해소가 아닌 시선이다."
<틔움>은 우리의 바쁜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친 감정과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전시였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작가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틔워낸 감정의 씨앗을 따라가며, 동시에 내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좋았다.
앞으로도 이러한 멈춤의 시간을 종종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작은 문장을 하나 가슴에 품고 전시회장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