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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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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무대 위를 비추던 조명이 꺼진다. 관객이 앉아 있는 곳과 관객이 바라보는 곳 모두 어둠뿐이다. 빛이라곤 무대 위 마스킹 테이프와 좌석 유도등이 전부인 순간, 접이식 의자들이 차례로 접히며 '탁, 탁, 탁, 탁'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관객석에서 첫 박수가 터져 나온다. 곧 귀가 쨍할 정도의 박수 소리가 극장을 꽉 채운다. 온 마음이 담긴 박수 소리는 파도 소리를 닮았다. 서로 맞부딪히며 끝없이 밀려오니까.

 

파도에 호응하듯 백색 빛 조명이 서서히 켜진다. 죽었던 사람, 죽였던 사람, 울던 사람, 화내던 사람 모두 웃으며 등장한다. 캐릭터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해맑은 배우들이 관객을 향해 두 팔을 벌린다. 박수 소리가 충분해졌을 때쯤 배우들은 뻗었던 팔을 거두고 고개를 숙이며 생각한다. '박수 소리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관객들은 배우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며 생각한다. '어쩌면 오늘 이 공연은 하이라이트 장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짧고도 영원한 이 시간을 '커튼콜'이라고 부른다.

 

 


19세기 배우들은 '커튼콜'을 거부했다



커튼콜(Curtain Call). 막(Curtain)이 내린 뒤 사라진 배우를 다시 무대 위로 불러내는 행위(Call)다. 당신은 이 문화에 얼마나 익숙한가? 제 일을 다하고 퇴장한 배우를 박수로 다시 불러내는 이 문화에.

 

지금이야 ‘공연 후 커튼콜’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커튼콜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배우들이 관객에게 인사하는 관습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풍경은 아니었다. 오늘날 같은 커튼콜은 1800년대에야 유행하기 시작했다. 노래가 아닌 등장만을 요구하므로 앙코르와 다르고, 배우의 발언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무대 인사와도 다른 커튼콜은 당시 배우들에게 꽤 당황스러운 문화였던 모양이다. 당시 배우들은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막이 내려간 무대에 다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게 관객의 박수를 받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실제로 한 프랑스 배우는 커튼콜을 거부했다가 관객에 의해 숙소로 쫓겨났다고도 한다.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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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법도 하다. 커튼콜은 상당히 불리한 고백이니까. 커튼콜은 지금까지 관객이 몰입한 캐릭터가 사실 배우가 연기한 '가짜의 인물'이라고 인정하는 행위다. 그뿐일까. 관객에게 박수를 돌리는 것은 배우가 연기하는 내내 관객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자백이고, 스태프들에게 박수를 돌리는 것은 음악과 조명이 관객의 몰입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정되고 있었다는 고백이다.

 

자칫 잘못하면 커튼콜은 "이 이야기는 모두 허구입니다"로 시작하는 작가의 말과 비슷한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모든 게 가짜라면,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할 노력조차 들이지 않는다면 수용자는 이 이야기를 왜 공들여 봐야 하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 질문은 반드시 몰입을 방해한다. 그래서 영화와 드라마는 이야기가 가짜로 보이지 않도록 CG 처리에 힘을 쏟는다. 소설은 독자가 인물이 실존한다고 믿도록 설정을 치밀하게 구축한다. "실제로 존재할 법한 세계·장소·인물"이라는 평가는 영화·드라마·소설에선 극찬으로 통한다.


연극과 뮤지컬은 다르다. 극예술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가짜임을 기꺼이 인정한다.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극장 크기에 맞게 재편된 공간, 가끔은 텅 비어 있는 무대, 관객석을 바라보며 독백하는 배우들, 이 모든 것은 연출진과 배우진의 '가짜' 선언처럼 느껴진다.


"그래요,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다 가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 가짜를 말해보겠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가짜는 영영 가짜로 남기도 하고, 그런 줄로만 알았더니 진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관객들이 각자만의 진짜를 찾아내도록 돕기도 한다. 극단의 허구는 오히려 극단의 진실과 맞닿아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환호한다. '이 이야기가 가짜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오히려 '이 이야기가 가짜이기 때문에'. 그들이 최선을 다해 가짜를 보여줬기 때문에.


 

 

커튼콜이 배우만을 위한 시간이라고?



그렇다면 커튼콜은 배우만을 위한 시간일까?

 

커튼콜은 흔히 배우를 위한 문화로 인식된다. 영화나 드라마로 "진출"할 생각이 없느냐는 (당황스러운) 질문에 배우들은 곧잘 이렇게 답한다. 공연장에선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감각이 느껴진다고, 공연이 끝났을 때의 박수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고.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온 마음을 다해 박수쳐주는 일은 인생에서 몇 안 될 귀한 경험이다. 작가나 화가가 작품을 끝냈을 때 처음 듣는 소리가 대부분 본인의 들숨 혹은 날숨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더욱 그렇다.

 

극장에서 나와 빨개진 손바닥을 비비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왜 배우에게 박수로 감동을 표현할까?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박수의 기원을 엄마의 친밀 행동에서 찾는다. 엄마는 아기를 안심시키기 위해 수시로 등, 어깨, 배를 두드린다. 모리스는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으로 신체 부위를 두드려주는 행위가 박수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왼손을 '누군가의 등'으로, 오른손을 '등을 두드려주는 손'으로 해석하면 박수는 그 자체로 격려와 사랑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는 "팔을 벌리는 연주자의 행동은 엄마가 안아주기를 기다리는 아기의 행동과 발생학적으로 동일"하다고 덧붙여 설명한다.² 이 해석에 따르면 배우는 사랑을 원하는 사람이고 관객은 그에게 사랑을 안겨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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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커튼콜에서 박수로 사랑을 받는다면 관객도 응당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 커튼콜은 관객을 위한 문화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커튼콜을 만드는 주체는 관객이지 않은가. 커튼콜은 관객의 박수로 시작해 관객의 퇴장으로 끝나니까.

 

우선 커튼콜은 '당신에게 받은 감동을 나도 전해주고 싶다'는 관객의 욕망을 표출하게 한다. 이보다 중요한 건 의도된 틈새다. 커튼콜은 관객이 극의 여운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앞서 언급했듯 "죽었던 사람, 죽였던 사람, 울던 사람, 화내던 사람 모두"가 웃으며 등장하니까. 커튼콜이 없는 공연을 가정해 보자. 마지막 장면이 끝나면 배우가 퇴장한다. 관객들은 박수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관객석 조명이 켜진다. 관객 퇴장을 도와드리겠다는 목소리가 극장 입구에서 들려온다. 무대 위로 웃으며 등장하는 배우는 없다. 무대 위에서 절망하거나 소리 지르던 그 인물이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 만약 그랬다면, 난 접이식 의자에서 오래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 극이 준 여운을 다듬어야 했을 것이다. 눈앞에서 펼쳐진 파괴적인 이야기가 만들어 낸 마음속 부스러기를 정리하느라 바빴을 테다.


커튼콜은 관객이 가라앉지 않도록, 여운에 너무 깊게 빠지지 않도록 막아준다. 대체 왜? 창작진들은 관객들이 작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야 더 좋은 것 아닌가?

  

답을 알려준 건 엉뚱하게도 화성학 교재였다. 화성학에 따르면 음악은 결국 '혼란'에서 '평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예술은 대부분 비슷한 흐름을 따른다. 삶을 통째로 흔들어버리는 혼란, 혼란을 겪기 전의 평화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평화. 일반적으로 공연은 혼란을 주는 극적인 사건에 집중한다. 인물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관계가 얼마나 파괴될 수 있는지. 이에 비해 평화로 가는 과정은 너무도 짧다. 게다가 공연은 '지금 내 눈앞에서' 발생하는 만큼 영상 매체와 비교할 수 없는 파괴력을 지닌다. 혼란이 크다면 그만큼의 평온도 따라와야 한다. 공연은 그 평온을 커튼콜에서 완성하는 것이다. 여운에서 벗어난 관객은 오히려 그 극을 더 사랑하게 된다. ‘혼란’으로 가득할 뻔했던 공연에 커튼콜이 ‘평온’으로서 마침표를 찍어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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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뮤지컬 배우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히 커튼콜 때 기립 박수를 치기 위해 일어나서 의자가 타다다닥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 울음을 꾹 참는다. 이때 '이게 내 길이지, 혜진아 다른 거 하면서 어떻게 행복할래?'"³ 배우들이 모든 이야기가 가짜였음을 고백하는 순간, 관객들이 그 고백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각자의 그리고 서로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이런 가짜라면 얼마든지 속고 싶다고, 최선을 다해 가짜를 보여줘서 고맙다고 파도와 같은 소리로 속삭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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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¹ Sophie Nield. (2012. 4. 3.). "Are curtain calls a clapped-out convention?".

² 김정운. (2025. 03. 07.). ‘주먹 인사’ 한 번에 모두가 황홀해했다 [의사소통의 심리학]. 매일경제.

³ 위수정. (2022. 11. 08.). "허혜진, '브론테'→'아티스탁 게임' 롤러코스터 같은 서른 살". 열린뉴스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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