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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향한 애정은 유명하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결과 발표를 앞둔 인터뷰에서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한국에 돌아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공부할 생각에 결과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됐다’고 했고, 우승 직후 기자회견에서도 다음 레파토리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고 싶다고 밝혔다. 청소년 시절 여러 인터뷰에서도 그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내 마음 속 음악의 빅뱅’이자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킬 만큼 깊은 의미를 지닌 곡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첫 인터내셔널 단독 앨범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내고 싶다고 말했던 그지만, 의외로 데카와의 계약 후 첫 앨범은 ‘쇼팽 에튀드 전곡’이었다. 혹시 더 완성도 높은 해석을 위해 의도적으로 시간을 두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랬던 그가 마침내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고 나왔으니, 기대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임윤찬은 모든 곡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그러면서도 항상 설득력을 잃지 않는 연주를 선보이는 피아니스트다. 특히 바흐의 음악은 연주자가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풍부하기에 이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얼마나 참신한 연주로 청중을 놀라게 할지 더욱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2022년에 그가 선보인 바흐 ‘신포니아’는 상당히 절제된 낭만성을 보여주었던 바 있었기에 내가 상상했던 자유로움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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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서막을 연 작품은 이하느리의 신곡 ‘…Round and velvety-smooth blend…(2024)’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촉망 받는 젊은 작곡가의 음악을 통해 현대 음악의 현주소를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느껴졌다. 이하느리의 부연 설명대로 차갑디 차가운 얼음 조각이 유리잔에 쨍그랑 부딪히는 듯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단순한 음으로 고요하게 시작해서 점차 음형이 쌓이다가 요란하게 파괴되고 사납게 폭발하는 등 다채롭게 변모하더니 다시 처음의 고요한 음으로 회귀하며 산산이 흩어지듯 소멸하는 구조였다는 면에서, 이어질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잠깐의 입퇴장 후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시작되었다. 아리아는 몇몇 베이스 음을 강조하고, 노래하듯 서정적으로 연주했다는 점 외에는 예상보단 담백한 연주였다. 그러나 뒤따르는 변주들에서 임윤찬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어코 비껴가며 상상초월의 연주를 펼쳤다.

 

모든 변주가 빠짐없이 파격적이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몇 개의 변주들만 꼽아보고자 한다. 8번과 20번, 23번 변주에서는 규칙적인 듯하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베이스음들이 생동감 넘치는 북소리처럼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10번 변주는 본래 가벼운 트릴로 시작하는 변주인데, 첫 음을 의도적으로 분리해 과감하게 강조하며 시작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7번 변주에서는 명료한 아티큘레이션을 일부 희생하는 대신,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마치 몽글몽글한 거품이 일어나듯 유려하게 연주했다. 18번 변주에서는 도돌이표를 반복할 때 옥타브를 내려서 치고, 7번이나 19번 변주에서는 옥타브를 높이는 등의 변형도 서슴지 않았다. 25번은 드라마틱한 음량 변화로 음향의 층을 쌓아가면서 낭만주의 음악과도 같은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

 

임윤찬은 왼손의 독립적인 자아가 있는 듯 베이스 선율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식의 연주를 자주 하는 편인데, 이번 연주에서는 열 손가락 각각에 별개의 자아가 존재하는 거 같았다. 단순히 숨겨진 성부를 드러내는 수준을 넘어 기존 성부를 해체했다가 새로운 음형으로 재구성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순간도 있었다. 때로는 음을 하나씩 정확히 찍어내듯 타건했고, 때로는 부드럽게 연결하며 노래하듯 선율을 부각시켰다. 모든 반복 구간은 완전히 다른 음악처럼 느껴질 정도로 음색, 음량, 루바토, 페달링, 강조점 등 거의 모든 요소에서 차별화된 해석을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그는 도돌이표를 완전히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꾸밈음과 루바토가 풍부한 연주였지만 항상 낭만적으로 연주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엎어지듯 의도적으로 리듬을 어긋나게 밀어내며 연주하는 부분이 많았고, 왼손에서는 마치 엔진이 맹렬하게 작동하는 듯한 강렬한 울림이 자주 느껴졌다. 돌연 스타카토로 전환하여 경쾌하게 음을 튕겨내기도 했다. 피아노의 타악기적 특성을 극대화한 임윤찬의 연주는 종종 '록 음악 같다'고 평가받지만, 바흐의 음악에서까지 이런 면모를 경험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의도적으로 페달을 길게 쓰며 여음 위에 새로운 음들이 쏟아지거나 음들이 서로 뒤얽히게 만드는 등의 효과로 오케스트라적인 풍성한 음향을 연출하여 때론 낭만주의 음악처럼, 때론 현대 음악처럼 들렸다. 무한대의 음량 조절력을 구현해 낸다는 인상은 이번에도 여전했다. 점진적으로 혹은 급격하게 볼륨을 조절할 때는 소리의 크기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감 자체가 변화하는 느낌을 주었다. 마치 다양한 음색 효과를 갖춘 전자 악기로 연주하는 듯, 음색도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화했다. 바로크 시대 음악을 현대 피아노로 연주할 때 시도해 볼 수 있는 모든 실험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듯했다. 이미 수많은 전설적인 레코딩이 존재하고 더 이상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까 싶은, 이른바 ‘사골’ 레파토리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2025년에도 연주해야 하는 당위성만은 기어코 설득해버린 파격적인 연주였다.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서 연주를 마친 임윤찬은 앵콜을 기대하고 있는 청중을 슬쩍 쳐다보더니 왼손만으로 단 32개의 음을 연주하고 무대를 떠났다. 그것이 아리아의 베이스 음이라는 것은 앵콜 표지판을 보고 알았다. 마치 32개의 다채로운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화려한 쇼가 끝난 후, 그 모든 요리를 관통한 핵심 원재료의 뼈다귀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사라진 셈이다. 실로 재치 넘치면서도 본질에 충실한 앵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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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관람한 후 임윤찬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에게 무한한 음악적 가능성을 자유롭게 시험해 볼 수 있는 실험실이 아니었을까. 일부 변주에서는 실험을 넘어 순수한 ‘놀이’에 가까운 모습도 보였다. 마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는 정교한 장난감이 주어진 어린아이가 마음껏 탐구하며 노는 것 같았다. 더불어, 자신의 해석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이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적 방향성을 결코 타협하지 않는 그의 예술적 소신은 이번 공연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세상에 내놓을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이 과연 이번 공연만큼의 파격성과 자유로움을 담아낼지 궁금하다. ‘쇼팽 에튀드 전곡’에 이어 또다시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그의 새 앨범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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