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 번씩 예술의 쓸모에 대해 고민할 때가 있다. 특히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예술이 할 수 있는 게 있을지 의문이 들 때는 무력감이 몰려든다. 예술의 쓸모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을 때, 어느 정도의 풍족함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일까? 예컨대 전쟁 한복판에서 예술은 무슨 힘이 있는가?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위기 앞에서 인간은 한 끼 식사 대신 예술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럴 가치가 있을까?
이런 상상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례가 있다. 바로 세계 2차대전 때 나치에 의해 무려 900일 가까이 포위당했던 소련의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일어난 일이다. 독일 나치군은 레닌그라드를 직접 무력으로 함락시키는 대신, 도시를 드나들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해서 완전히 고립시킴으로써 시민들이 굶어 죽어 스스로 멸망하기를 기다렸다. 그 결과 당시 레닌그라드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거나 병들어 죽었다. 길거리에는 시체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그 시체를 먹으면서 연명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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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런 와중에도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시 낭송과 음악이 흘러나왔고, 미술관 지하에서는 예술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심지어 뮤지컬과 음악회 공연도 계속 열렸다. 공연 도중 출연자가 굶어 죽는 일까지 발생했지만, 그들은 공연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순간에도 그들이 예술을 계속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대체 예술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길래?
예술이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미친 영향 중 가장 분명하게 증명된 사례는 바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초연 사건이다. 소련 국민들이 당시 가장 사랑했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참혹한 전쟁 와중에 작곡을 이어 나갔다. 물론 유명한 예술가로서 보통의 시민들에 비하면 조금은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 역시 녹록지는 않은 환경이었다.
도시가 포위됐던 시기에 작곡된 그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는 말 그대로 고립된 레닌그라드를 위한 곡이었다. 이 곡은 러시아 내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 밖 미국에서도 큰 관심을 받으며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정작 레닌그라드에서는 100명이 넘는 대규모 편성 교향곡을 연주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에는 고작 15명이 생존해 있었고, 남아있는 단원들 역시 제대로 악기를 연주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영양 부족 상태였다. 겨우 모인 첫 리허설에서 단원들은 15분밖에 연습을 지속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레닌그라드에서의 공연이 사기를 올리는 데 효과적일 거라 판단한 소련은 군에 징집되어 있던 연주자들을 돌려보내고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연 당일 불 켜진 콘서트홀이 나치군에 의해 폭격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소련군은 화력을 한 곳에 몰아 나치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도 했다.
레닌그라드에서의 초연 날짜는 히틀러가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파티를 벌였던 날과 같은 날로 정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열린 공연에는 수많은 굶주린 소련 시민들과 군인들이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하루에 한 번 배급받을 수 있는 빵 한 조각을 포기하고 공연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도 많았다. 단원들의 상태가 아사 직전이었기 때문에 공연의 질은 좋지 못했지만, 음악에 굶주려 있던 관객들은 엄청난 환호성으로 답했다.
이날의 음악은 나치군 진영을 향해서도 생방송 되었다. 음악을 들은 나치군은 패배감을 맛보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함으로써 손쉽게 파괴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생의 의지와 희망이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이 음악으로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인내력과 의지를 끌어냈다.
공포가 한결 가벼워졌다. 더 이상 우리를 움켜쥐지 않는다. 공포는 우리 밖에 있다. 우리 안에는 음악이 있다. 모두가 음악의 힘을 느꼈다. 각별한 소속감을 느꼈다.
- 레닌그라드 공연 당시 한 일기 작가가 남긴 글,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중
이 공연 이후 레닌그라드 포위는 1년 반이나 더 지속됐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실제 많은 상황이 바뀌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조금씩 삶의 활기를 찾기 시작했고, 소련군은 나치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이 소련 군인과 국민의 사기를 살리고 전세를 반전시킨 전환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예술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 수 있는 기적같은 힘이 있다는 것을 생생히 증명해 낸 사례였다.
예술의 쓸모는 그보다 전에 작곡되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의 초연 사례에서도 빛을 발한 바 있다. 사실 레닌그라드는 세계 2차대전 이전에도 스탈린의 대숙청이 휩쓸고 지나간 도시였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작위로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이때 발표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소련 국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특히 수많은 관객들이 느린 3악장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가족과 친구의 죽음에 마음껏 슬퍼할 수조차 없었던 엄혹한 시기에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그들에게 애도의 시간을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예술은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감정을 유도할 수 있다. 애써 억눌러오거나 외면했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직관적이고 정확하게 건드려 분출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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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불문하고 예술은 ‘고양감’을 준다. 고양감이란 언뜻 풍요 속에서나 꽃피울 수 있는 사치이자 허영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가 살아온 이래로 어떤 시기에도 예술이 멈춘 적은 없었다. 예술은 도리어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을 때조차 사람답고자 하는 욕구를 끌어내는 힘이 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만연한 죽음 속에서도 예술을 멈추지 않았던 까닭은 인간다움을 지키기 어려웠던 시기에도 끝내 인간으로 남고자 몸부림 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술로서 발현되는 ‘고양감’의 가치는 거기서 온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예술가는 애초에 그런 원대한 의도를 가지고 예술을 만드는 걸까? 이처럼 강력한 곡을 쓰며 소련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쇼스타코비치는 실제 어떤 의도로 곡을 작곡한 걸까? 그러니까 교향곡 5번은 정말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하고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애도의 음악으로 기획된 걸까? 교향곡 7번은 나치군의 만행을 폭로하고 소련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음악으로 만들려고 했던 걸까?
이어지는 2편에서는 같은 사례를 바탕으로 예술이 사상을 전달할 수 있는지 다뤄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