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간만에 아껴두었던 ‘어쩌면 해피엔딩’ dvd를 꺼내보았다. 그리고 여지없이 눈물이 흘렀다.
감히 최애 작품 중 하나로 뽑을 수 있는 어쩌면 해피엔딩은 몇 번이나 반복 관람해서 내용을 줄줄 다 외우고 있어도 매번 속수무책으로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어쩌면: 확실하지 아니하지만 짐작하건대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뜻이다. 이 뮤지컬을 가장 처음 접했을 때 제목이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라 함은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혹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해피엔딩일 수도, 새드엔딩일 수도 있다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공연을 보기 전 가졌던 이러한 질문들은 막이 내림과 동시에 이보다 작품을 더 완벽하게 설명하는 제목은 없을 것이라는 감탄으로 변했다.
시놉시스만 읽어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로봇들의 이야기이다.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의 이야기. 그러나 공연을 보다 보면 어느새 두 주인공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은 채로 이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비인간인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보여주는 인간다움에서 비롯된다.
올리버, 그리고 클레어는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만들어지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이들은 각자의 주인들과 관계를 맺었고, 그 경험에서 발생한 다양한 감정들은 역으로 올리버와 클레어 안에 내재된다. 올리버는 자신의 옛 주인이었던 제임스를 아주 신뢰한다. 반면, 클레어는 주인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영원한 마음은 없다고 굳게 믿는다. 끊임없이 올리버가 받을 상처를 걱정하던 클레어는 제임스가 올리버에게 남긴 마지막 레코드판을 보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구나를 깨닫는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은 현실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수많은 타인과 부대껴 살아가면서 우리는 사랑과 우정을 쌓고 누군가와 신뢰를 나누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처 주고, 상처 받고, 이로 인 슬퍼하기도 단념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도 한몫한다. 공연 초반 지지직거리는 레코드판 소리처럼 어딘가 어색하게 삐걱거리다가 점점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지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들이 가진 인간다움에 더 잘 몰입하도록 돕는다.
이렇듯 누구보다 인간과 닮아있는 올리버와 클레어는 함께 제주도로 떠나는 여정에서 사랑을 느끼고 서로의 세계로 스며든다. 자신들도 인간처럼 사랑을 느낄 수 있음에 기뻐하지만, 그 이면에는 슬픔과 고통 역시 뒤따른다는 것도 깨닫는다.
한정된 시간은 언젠가 완전히 멈춰버릴 그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속에서 너무나도 달랐던 올리버와 클레어가 사랑에 빠지고 서로 닮아가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저마다의 추억을 떠올리거나 혹은 나도 저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하기도 한다. 인간과 다르지 않은 로봇들의 모습은 또 한 번 관객들의 심장을 울린다.
기억을 지우기 전 클레어는 올리버에게 자신과 만나기 전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떠올려보라고 한다. 클레어와 만나기 전 올리버는 제임스와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화분을 친구 삼아 살아왔다.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삶이었지만 그래도 올리버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은 제임스와 함께했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클레어와의 기억도 올리버에게는 놓을 수 없는 행복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올리버는 결국 기억을 지우지 않는 선택을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상대방과의 추억을 온전히 안고 가는 것, 그것이 올리버의 사랑이다. 반면, 클레어의 선택은 공연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날은 기억을 다 지운 듯 보이다가도 또 어떤 날은 올리버와 같은 선택을 한 듯 보인다.
그러나 클레어의 기억이 온전하든 그렇지 않든 둘은 다시 만난다. 이때 둘의 모습 뒤로는 ‘사랑이란’ 넘버가 연주된다. 올리버와 클레어가 처음 서로에게 사랑을 느꼈을 때 부르는 이 넘버가 연주됨으로써 결국 이 둘이 또다시 사랑에 빠질 것임을 암시한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어린 시절 읽었던 여느 동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확신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어떠한 가능성을 말하고 싶을 때 우리는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불가능과 가능을 동시에 포함하는 표현이기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으며 다음으로 나아간다. 우리에게도, 올리버와 클레어에게도 끝은 존재한다. 영원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끝을 알고 있음에도 함께하는 둘의 이야기가 더 아름답고 찬란하게 느껴진다.
‘흐르는 시간 속 결국 모든 게 흩어질 걸 알면서 우리는 왜 사랑했을까’ 라는 가사에 우리는, 그리고 올리버와 클레어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극의 마지막, 클레어는 충전기를 빌려주는 올리버에게 괜찮을까요?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올리버는 대답한다. ‘어쩌면요’. 누군가는 이 열린 결말에 되려 의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만하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끝을 보더라도 그들은 함께 행복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