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위드 햄릿]은 햄릿이 4명의 햄릿으로 분열되어, 4개의 자아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수를 향해 나아가는 햄릿의 여정을 진솔하게 그린 이야기이다. 4명의 배우가 모두 햄릿이 되어 꺼내는 이야기들은 어지러운 청춘으로 가득 차 있다. 한마디로 [플레이위드 햄릿]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고전[햄릿]을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4명의 배우들은 각기 다른 4명의 햄릿이 되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두고 다양한 반응을 일으킨다.
“햄릿 난장”
"햄릿 난장"은 이 연극을 표현하는 가장 알맞은 단어일 것이다. 햄릿이 4명으로 분열된다는 개념 자체가 고뇌하는 햄릿의 캐릭터와 잘 맞을 뿐만 아니라, 햄릿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도 평소에 겪는 일이 아닌가? 우리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자아가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는다. 이렇게 하는 게 나을까, 저렇게 하는 게 나을까, 아니 그냥 다 엎어버리고 싶다 등등. 햄릿에게도 이런 생각들이 난무하지 않았을까? 죽느냐 사느냐를 고리타분하게 고민하던 평면적인 햄릿에서, 인간적인 햄릿으로 탄생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4명의 햄릿이 가장 잘 드러났던 장면은 결투를 앞두고 겪는 내적 갈등을 표현한 장면이다. 4명의 배우는 관객을 바라보며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동시에 모두 쏟아낸다. 죽음을 각오한 햄릿의 감정을 ‘명확한 언어’로 풀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상황, 어쩌면 하나의 형태’로 표현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햄릿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남아있는 감정과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는 장면을 통해 햄릿의 감정이 명확한 대사로 설명되지 않아도, 햄릿의 두려움과 결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적인 햄릿의 마음이 말이 아닌 상황과 형태로 전달되는 순간이다.
인간적인 햄릿을 넘어서서 [플레이위드 햄릿]의 햄릿은 생동감 있는 존재이다. 이 연극에서 ‘연극’과 ‘음악’은 아주 큰 역할을 한다. 먼저, 고전[햄릿]에서도 연극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햄릿은 삼촌이 아버지를 살해한 방법을 똑같이 연극에서 재현하며, 삼촌의 반응을 살폈기 때문이다. 이 스토리는 [플레이위드 햄릿]에서도 중요한 이야기가 되어 재현된다.
이외에도 배우들은 역할극을 하며 ‘연극’이라는 속성을 놓지 않고 이어간다. 4명의 배우는 모두 햄릿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클로디어스, 오필리어, 레어티즈가 되기도 한다. 장난스럽게 역할을 상징하는 모자를 이리저리 던지면서 누가 어떤 역할을 할지 정한다. 역할이 정해지면 이야기는 다시 진행된다. 이렇게 4명의 배우가 각 역할을 돌아가면서 연기하는 장면은 ‘연극’의 장점을 최대로 살린 장면이자, 햄릿이 생동감 있게 전해지는 느낌을 주었다.
배우들은 기타, 피아노, 젬베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한다. 특히 [햄릿]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 배우들은 젬베를 들고 싸운다. 지루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자, 젬베의 소리만으로 긴박감이 전해지게 하는 방식이다. 또한, 마지막 엔딩곡에서 4명의 배우들이 다시 일어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바로 “내 꽃 같은 젊은 날에 바치는 노래”. 마지막을 노래로 끝내니까 공연의 여운이 더 오랫동안 남는 느낌이었다. 공연을 보면서 연극과 음악은 그 자체로 청춘을 상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연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연극과 음악은 햄릿의 청춘을 생동감 있게 만들고, 그렇기 때문에 햄릿 앞에 놓인 죽음이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햄릿, 왜 다시 너야?
17세기 영국에서 쓰인 12세기 덴마크 왕자 햄릿이 21세기 대한민국에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의 마지막, 결투 이후 죽음을 맞이한 햄릿은 다시 ‘부활’한다. 이 장면에 대해 연출가님이 프로그램 북에서 설명해주셨는데, 죽음 같은 엔딩에서 다시 일어나 “내 꽃 같은 젊은 날에 바치는 노래”를 시작할 때 ‘부활’을 생각한다고 하셨다. 마치 이 장면처럼 햄릿은 곳곳에서 부활하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햄릿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닿을 수 있었던 건 햄릿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부활’했기 때문아닐까?
햄릿은 보통 고뇌에 빠진 우유부단한 인물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플레이위드 햄릿]은 우유부단함이라는 햄릿의 지긋지긋한 꼬리표를 떼주었다. 4명의 자아가 쏟아내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햄릿의 선택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마주해야겠다는 생각, 삼촌이랑 결혼한 엄마에 대한 원망, 삼촌에 대한 분노와 삼촌이 자신을 죽일 것 같은 두려움, 충동적인 살인과 사랑하는 연인의 자살...이 모든 소용돌이 속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아마 두렵지 않을까. 아버지가 죽고 난 후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햄릿은 살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끝까지 살기로 선택했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은 죽음이었다. 햄릿은 괴로운 현실에 죽기를 바라지만, 막상 죽음 앞에 서니 죽음이 두려웠다. 우리의 세상에서 죽음은 너무나 자주 별거 아닌 것처럼 그려진다. 아니, 그려지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죽음을 우리가 너무 쉽게 다룬다. 매일 누군가는 죽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치부하며 함부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동정한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우리 앞으로 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두렵지 않을까? 햄릿에게 왜 그때 클로디어스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
그냥 잘 살고 싶었는데, 그래서 차근차근 선택하며 이 길을 걸어온 건데, 막상 나에게 남은 선택지가 오로지 하나일 때. 그게 죽음일 때.
우리도 이럴 때가 있지 않나. 잘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걸어온 길이 나를 우울로, 상실로, 쌓여가는 과제와 업무로 이끌 때. 세상은 나에게 네가 이 길을 바꿀 수 있다고, 선택은 네가 하는거라고 말하는데, 그 말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이젠 다른 선택을 모르겠으니까.
어쩌면 운명은 그 옛날부터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혀 왔는지도 모른다. 결말이 죽음으로 정해졌을 때 우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김도완 배우가 햄릿에게 하는 말이 우리의 선택을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하고 싶은 대로 끝까지 가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쾌감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햄릿, 성공해라. 네가 원하는 바를 해내. 네가 죽더라도 선명하고 붉게 복수를 물들이자. 추락이 정해진 결말이라면 두려워하지 말고 더, 더욱 높이 날아오르자”
결말은 정해졌지만, 내용은 아직 모르는 것이다. 다른 작품처럼 햄릿이 한명일 수도 있고, [플레이위드 햄릿]처럼 햄릿이 4명일 수도 있고, 마지막 결투가 칼이 아닌 젬베일 수도 있다. 죽느냐 사느냐의 결말은 이미 죽기로 정해져 있다. 정말 중요한 건 어떻게 사느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