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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연극 [워크맨]은 영어로 된 명사이지만 부제목이 [걷지 않고 (...)]인 것을 고려하면, 이 연극 제목의 원어 의미는 'WALK-man'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추론해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연극의 부제목 뒷부분이 [일하지 않아 (...)]인 것을 고려해본다면, 제목의 또 다른 의미가 'WORK-man'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 연극의 제목에 대해 보통 영어로 제목을 붙일 경우 보통 원어인 영어 단어를 병기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았고 또한 우리가 평소에 work와 walk를 한국어로 발음하거나 적을 때 '워크'라고 하는 일반적인 관례가 있다는 점에 따라서 덧붙여 추리해본다면, 이 연극의 주제는 다음의 내용을 시사하고자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이 연극은 연극의 배경처럼 35년 후인 2060년이 되고 그 이후에도 인간에게 '걷고(walk) 일하는(work) 활동'이 없다면, 아무리 인간의 편리와 행복을 위한 무수한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삶의 공백을 다 메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내용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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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맨을 관람하러 갈 당시, 걸을 때마다 발목이 시큰하게 아팠다. 정확히는 발등이 아팠다. 그래서 혜화역 근처에 있는 대학로예술극장이 직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걸어서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종로 마을버스를 타고서야 극장에 도착했다. 이 연극의 부제목이 [걷지 않고 일하지 않아 발생한 비극에 대하여]인 것에 나도 편승하여,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걷지 '못해' 발생한 비극을 몸으로 느껴가며 이 극을 관람했다. 절뚝거리면서 불편하게 걸어보니, 다리가 불편한 사람 혹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어려움이 비로소 공감되기 시작했다. 내 발로 걸어서 어딘가를 이동하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인지를 실감하게 된 것이다.

 

발등이 아픈 것은 아직도 내가 나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해서, 아니면 알고도 묵인한 것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바닥이 납작한 단화 형태의 신발을 신고 일주일 동안 많이 걸어다닌 것이 화근이 되었다. 내가 평소에 부러워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형태가 예쁘지만 발에는 좋지 않은 불편한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다. 발 건강에 좋지 않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게 가능한 것이 근본적으로는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닐 수 있어도, 옷태를 살아나게 하는 신발을 신고 어딘가로 가고 싶은 바람이 평소에 컸던 것은 사실이다.

 

바람이 컸다는 것은, 그만큼 그동안 그러고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년 전에 납작한 샌들을 신고 걷던 도중 갑자기 발바닥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져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바로 병원을 간 적이 있다. 병명은 아킬레스건염이었다. 이후 재활센터를 다니면서는 발의 아치가 무너져서 그렇다는 추가적인 진단을 받고는, 발 아치를 다시 높이는 깔창을 주문 제작해서 신고 다니게 되었고 꾸준히 운동까지 한 결과 상태가 나아질 수 있었다.

 

아픈 게 낫고 나은 것이 익숙해지면, 아팠다는 사실도 잊히곤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또 과신하여, 이제는 불편하지만 예쁜 신발을 신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했건만 결과는 그렇게 또 반복되고 말았다. 이번에 아픈지 하루이틀 정도 되었을 때만 해도, 이러곤 말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걸을 때마다 거슬리는 발등의 찌릿찌릿한 느낌은 사람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었고, 결국 정형외과를 방문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큰 문제는 아니었고, 발등의 힘줄에 염증이 생겨서 내원을 2번 정도 더 해서 주사를 맞으면 나아질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현재까지 치료를 받고 있다.

 

몇 년 전 발에 대한 진단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걷는 것과 산책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걸으면서 보게 되는 정취나 풍경 혹은 그 풍경이 바뀌어 가는 것을 관찰하며 걷는 일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걷는 것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무언가 해결되지 않는 (주로 글을 쓰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있을 때, 그때마다 잠시 그 일을 내려놓고 한참을 걷다가 그 일을 잊을 정도로 계속 걷다보면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스르륵 떠오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이 아프게 되면서, 또한 대학원을 졸업한 뒤 직장에 다니게 되면서 점차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너무 많이 앉아 일했을 땐 허리도 아프고 무릎이 아프기도 했다. 그건 또 너무 일어나 걷지 않아 생긴 문제였고, 그때마다 일하다가 주기적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면서 점차 통증이 나아졌다. 오래 앉아서 일할 때 여기저기 통증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일하기에 편한 양반 자세로 앉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다가, 사무실 복도에 있는 정수기 물을 마시기 위해 이동하면서 우연히 옆 방에 의자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이 앉아 있는 자세를 바꾸는 걸 보았는데 하필 양반다리 자세였다!)

 

여기서 내가 '일(work)'을 너무 인간의 건강에 좋지 않은 것으로 묘사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사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 역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느끼게 된 극중 인물이 있었다. 바로, 살 만큼 살았기에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어서 안락사로 삶을 마감하고 싶어하는 103세 최미연 할머니의 서사였다. 거동이 불편한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한다. 그런데 가족과 어딘가를 갈 때마다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모두 그녀가 살았던 곳이나 혹은 자신이 일했던 곳이다. 우리가 30년 후를 상상해보았을 때, 인간의 수명이 대체로 길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굉장히 현실적인 예상일 것이다. 그러나 수명이 연장되어 100세를 훌쩍 넘긴 최미연은 한편으로는 자기 딸이 행복을 찾아가는 것에 자신도 행복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하고 활동하던 자신을 계속 회상하면서, 의사에게 정기검진을 받으면서 그 의사로부터 무려 3번의 심사를 거쳐 최종 승인되어야만 시행될 수 있는 안락사를 원하고 있다.

 

연극에서 '워크맨'은 모든 사용자에게 매일 정신 건강진단을 내려주는 앱이다. AI에 기반을 둔 워크맨 앱은 매일 사용자들의 우울 지수를 진단해주고, 그 진단 결과에 따라 약 처방과 강도를 달리한 걷기 운동을 추천해준다. 그렇지만 2060년의 사회는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2060년에는 주 3회 하루 3시간을 일하지만, 일하지 않는 시간만큼의 부분 동안 사람들은 여전히 괴로워하고 힘들어한다. 오히려 그 괴로움과 힘듦이 가중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인간을 또한 설명하는 구성체일 수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린 걷고 일해야 한다. 그것이 불완전할지라도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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