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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처음은 왠지 모르게 애틋하다.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은 우리를 설레게 하지만 두 번째 눈이 내린 것은 기삿거리도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첫 독립생활도 애틋하다. 설렘으로 시작한 독립이, 외로움을 거쳐, 익숙함에 이르는 과정. 그 시간이 영화 <트루먼 쇼>처럼 생중계되고 있었다면 아마도 영화의 주제는 ‘그럼에도 자취하세요’ 였을 것 같다.

 

나만의 공간을 오롯이 내 취향으로 채운다는 건 참 설레는 일이다. 더 이상 깔끔한 엄마의 성격에 맞춰 방에 침대만 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가구를 다 배치했을 때 어떤 분위기일지 상상하는 것도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포근한 아지트가 완성되어 있다. ‘이만하면 유튜브에 나오는 집 꾸미기 못지않겠는데?’ 라며 뿌듯해하기도 한다. 동그란 러그에 아이보리색 좌식 테이블. 취향에 따라 모양과 색은 가지각색이겠지만 대개 초보 자취생의 첫 인테리어는 러그와 테이블로 시작한다. 거기에 분위기를 더 내고 싶다면 스탠드나 무드등까지 추가한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고 싶다면 아기자기한 엽서를 마스킹 테이프로 붙이는 게 최고다. 본가에 있었더라면 예쁜 쓰레기로 취급되었을 것들이 초보 자취생의 눈엔 그저 예쁜 장식품일 뿐이다. 한때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했다. 하지만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람이 뭘 버리고 뭘 비우겠냐며 밤마다 오늘의 집 앱을 들락날락하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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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서도 나만의 공간인 내 방이 따로 있고, 엄마 아빠도 그 영역을 지켜주는 편이었다. 가족끼리 살면서도 나름 독립적인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유리병이 안 열릴 때 부를 엄마가 없고, 화장실 세면대가 막혔을 때 부를 아빠가 없다는 사실은 내가 진짜 독립했음을 느끼게 해줬다. 무엇보다 인간 본연의 외로움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분명히 낮에 친구를 만났는데도 집으로 돌아오면 ‘결국 세상에는 나 혼자구나’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어른들이 그러지 않았던가. 어차피 인생은 혼자라고. 이처럼 살다 보면 활자로만 받아들이던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때가 온다.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서 목욕하던 중 유레카를 외쳤다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집에는 욕조가 없다. 이토록 폼이 안 나는 깨달음이라니! 언젠가부터는 밤늦게까지 놀고 들어오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어두운 방을 마주하는 게 싫었을뿐더러, 내 손으로 불을 켜지 않으면 집 안이 계속 캄캄하다는 사실이 쓸쓸했기 때문에.

 

이제는 엄마도 인정한 계란 삶기 장인이 됐다. 처음에는 냄비 뚜껑을 닫고 계속 센불에 둔 탓에 물이 넘쳐흘렀다. 온 집안은 연기로 가득 찼고 혹여나 화재경보기가 울리진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친구들에게 계란 삶다가 화재경보기 울린 썰을 풀 상상도 했다. 그렇게 온갖 상상을 하며 삶았던 계란은 잘 까지지도 않았다. 힘겹게 깠음에도 노른자가 나를 놀리듯 보란 듯이 흘러내렸다. 반숙을 원했는데 그냥 내가 미숙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는 말을 되새겨야 할 정도로 손에 익었다. 물이 끓기 전까지만 뚜껑을 덮는다. 물이 끓기 시작하고 계란을 넣는다. 소금과 식초도 필수다. 그래야 계란 까는 데에 한세월이 걸리지 않는다. 촉촉한 반숙란을 만들고 싶다면 인덕션 기준 10분이면 충분하다. 타이머가 울린 후엔 재빨리 찬물로 옮겨 줘야 한다. 한 번에 알을, 그러니까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오는 용기 있는 계란을 구경하기 위한 마지막 꿀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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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10시에 가족들이랑 시켜 먹던 야식과, 과제 끝내고 새벽에 혼자 시켜 먹는 야식의 짜릿함은 확연히 다르다.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엄마 아빠는 모르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야식이 몸에 안 좋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래도 이게 혼자 사는 것의 묘미 아니겠냐며 종종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새벽에는 고요해서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우리집으로 향하는 소리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초능력도 생겼다. 이렇게 한 번 자유의 맛을 본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물론 때때로 집밥이 그리워져서 불시에 본가로 간다. 하지만 자취를 해본 사람이면 안다. 저녁밥 먹고 나면 다시 자취방이 그리워진다는 것을. 비록 완전한 경제적 독립은 아니어도 정서적 독립만큼은 확실히 배우는 중인 것 같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분위기에 젖어 새벽에 일기를 쓰거나 쉬는 날에 나만을 위한 근사한 요리를 만들면서 혼자 놀기의 장인이 되어가고 있다. 물리적으로든 은유로든 인생은 혼자라서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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