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무언가를 잃어버려야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걸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어른이 되고 나니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내 한 몸을 내가 건사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니 꿈과의 거리는 멀찍하게 떨어진 것만 같고 행복한 순간에도 마음이 굶주린 듯한 상실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나 만화 속 등장인물이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며 외로워하는 장면을 이제 아무런 감정 없이 볼 수가 없다. 유년기의 울타리를 넘어온 후 줄곧 무언가를 그 시절에 두고 온 것만 같았다.
이런 헛헛한 맘을 달래는 데 효과적인 것은 좋았던 추억을 반추하거나 다시 경험해보는 일이다. 그리웠던 고향의 음식을 먹으면 향수병이 씻은 듯 나아진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어릴 적 좋아했던 책이나 만화, 캐릭터 같은 것들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좋아한다는 게 요즘은 흉볼 일이 아니다.
어른다움은 어릴 적의 자신과 완전히 결별하는 데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걸 조금씩 받아들이는 추세인 것 같다. 젊은 층은 물론 중년층의 가슴까지 뜨겁게 달군 '슬램덩크' 붐에 이어 줄줄이 국내 팝업 행사가 열리고 있는 고전 캐릭터 IP의 인기를 보면 특히 유년기를 함께했던 캐릭터는 추억 이상의 의미를 갖는 듯하다.
대중에게 친숙한 고전 캐릭터 중 하나인 미피 또한 예외는 아니다. 최근 방문한 '미피와 마법 우체통' 전시는 미피의 팬이 아니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더라도 그 따뜻했던 시절 기억의 상자를 열어주었다. 귀여운 미피를 보고 싶어 방문했던 전시장에서 만났던 건 미피 뿐만 아니라 미피를 매개체로 전시장 곳곳을 경유해 온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70년의 시간을 건너, 미피는 잠자고 있는 어른의 동심까지 깨워주었다.
미피의 손을 잡고 돌아가보는 추억
어떤 것들은 경험하지 않았던 일도 있던 것처럼 만들어준다. 드라마나 뮤직비디오 등에서 재현되는 학창 시절의 첫사랑이나 청량한 여름이 대표적인 예시다.
'미피와 마법 우체통' 전시는 없던 추억을 심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놀이터가 되어주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전시는 미피의 세계를 구성하는 많은 캐릭터들의 관계에 관한 설명을 시작으로 중간 중간 쉽게 지나치기 힘든 미디어 전시와 인터랙티브 전시, 지금 봐도 여전히 귀여운 미피 굿즈 전시, 미피를 만든 일러스트레이터 딕 브루너의 그림, 미피를 이루는 것들에 관한 설명과 딕 브루너의 작품 세계까지 미피가 사는 마을의 안팎을 돌아보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이 과정에서 미피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대중에게 내보이는 여타 전시와는 다르게 우리의 삶에 스스럼없이 다가오며 거리를 좁힌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체험할 수 있는 전시들을 즐기다 보면 미피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순수한 충동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귀엽다'고 웃으며 초반에는 여러 조형물과 그림을 가볍게 지나치지만, 미피를 구성하는 색과 균형감을 전시장 곳곳에서 차츰 발견하게 되면서 치밀한 구성에 전시에 대한 몰입도도 올라간다.
미피가 사는 마을 곳곳을 누비면서 교실, 빵집, 레스토랑, 텃밭, 캠핑장 같은 장소를 지나오다 보면 동네 이곳저곳을 탐색하며 돌아다녔던 유년기가 떠오른다. 어디를 가도 환영받을 거라는 무의식 하에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기, 작은 놀이터에서도 온갖 지형지물을 상상해낼 수 있었던 그 시절을 말이다.
전시의 컨셉 또한 관람하는 이들이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로 돌아가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미피가 오랜 세월동안 건네받은 마음을, 편지를 찾아간다는 컨셉은 관람을 통해 내면에서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준다. 미피가 가족과 함께 만든 소중한 추억,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친구와 즐겁게 뛰어 놀았던 순간 느꼈던 즐거움, 힘들고 무서웠던 순간에 받은 위로 같은 구체적이고 솔직한 순간들은 동화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것은 관객 모두가 마음속에 간직한 어떤 상자를 열어주었다.
미피가 받은 편지에는 구체적인 일화와 미피에게 건네는 다정한 멘트들이 적혀 있다. 그 편지들은 관람객에게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 편지를 읽는 순간만큼은 비슷한 추억과 잊고 지냈던 사람들을 기억 속에서 다시 살려낼 수 있었고 상처받았던 순간의 오래된 상처를 위로받을 수도 있었다.
이런 전시를 관람하다 보면 살면서 건네받았던 호의와 가르침을 돌이켜보면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우리를 지탱하고 이루는 시간들에게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든다. 형형색색의 마을에서 친절하고 친근한 이웃, 다정한 가족과 살아가는 미피의 세계에 처음에는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은 아이의 세계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전시를 나오면서 깨닫게 된다. 어린 토끼의 세계는 단순한 선과 몇 개의 선명한 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음에도 그렇게나 다채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심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과 동심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가지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미피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미피를 만든 딕 브루너의 생애와 그가 미피를 작업하는 방식 등 딕 브루너의 작품 세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캐릭터를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다는 비화는 물론, 그의 생애와 미피의 작품 세계의 모티브, 작업 과정을 보면서 전시의 의미는 완전해진다. 미피의 세계가 다정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단순히 아동을 타깃으로 한 캐릭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현실의 세계에서 아이들에게, 더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라는 그의 진심이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을 위해 만든 캐릭터가 아니라 하더라도모두 한때 어린이였던 어른에게 그의 마음이 와 닿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것의 의미를 브루너는 그의, 미피의 방식으로 일깨워준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가 떨어뜨린 건 낭만과 상상에 푹 빠져보는 동심일 수도 있다. 미피 캐릭터를 만든 딕 브루너는 이 마음을 소중히 여겼다. 아이들을 위한 캐릭터지만, 어른들까지도 미피를 조형한 그의 마음에 공명하는 건 무엇 때문일지 이젠 안다. 잃은 줄 알았던 맘을 다시 소중히 여길 기회가 있다.
인사동센트럴뮤지엄에서 미피를 만나 그 맘을 다시 느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