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던데 나는 작년 11월부터 두 독서모임을 섬겼다.


이 글을 쓰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작년 3월부터 아트인사이트 독서모임이 열렸고 이 모임은 4개월에 한 번씩 멤버가 바뀐다. 1기를 시작할 때, 그러니까 작년 3월, 나는 한 친구에게서 ‘이건 바람이다’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 모임에 앞서 친한 친구들과도 간간이 독서모임을 진행해 왔기 때문에 그 친구 중 한 명이 ‘다른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바람이라 지칭하며 일종의 배신감을 장난스레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충신도 열녀도 아니거니와 두 독서모임을 섬기는 것이 문제일 리도 없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친구들과의 기존 독서모임은 거의 해체 상태였다. 그러니 난 나에게 소홀해진 독서모임에 실망하고 새로운 독서모임을 찾아 떠난 것뿐. 굳이 따지자면 환승을 한 것이지, 바람은 피지 않았다고.


왜 이렇게 긴 변명으로 시작하는지 스스로 의아하다만 어쨌든 나는 이렇게 새 독서모임을 시작했고, 1기2기를 즐거이 마쳤다. 2기의 마지막 모임이 10월이었는데, 이때 다들 아는 국가적 경사가 있었다. 바로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탄 것. 덕분에 내 친구들과의 낡은 독서모임 단체방에도 오랜만에 불이 켜졌고, 그렇게 우리는 차오르는 독서뽕(?)을 달래기 위해 독서모임을 재개했다. 아트인사이트 독서모임 3기도 예정대로 11월부터 진행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이때부터는 한 달에 독서모임을 두 탕씩 뛴 것. 이번에는 진정으로 바람을 피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marga-santoso-Xdbm5pdhbww-unsplash.jpg

 

 

4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두 개의 모임이니 총 8권을 읽어야겠지만 6권만 읽었다. 아트인사이트 독서모임 3기의 첫 모임이 탐색전으로 흘러가 책을 따로 읽지는 않아 한 번이 빠졌고, 친구 모임의 2월 독서모임이 3월 초로 연기되어 또 한 번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11월부터 순서대로 <흰>(한강), <시칠리아에서의 대화>(엘리오 비토리니), <시녀 이야기>(마거릿 애트우드), <사이코패스 뇌과학자>(제임스 팰런),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대런 아세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영원한 천국>(정유정)을 읽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각 모임에서 국내 문학, 해외 문학, 비문학을 한 권씩 다루며 참으로 균형 있는 식사를 했다. 여섯 권의 책과 여섯 번의 독서모임을 하니, 어떤 책을 골랐을 때 어떤 양상의 독서모임이 펼쳐지는지 알 것도 같다.

 

 

 

성공적인 독서모임 보증수표



책을 읽기 전부터 이번 모임은 재밌겠다고 확신한 책은 <시녀 이야기>와 <영원한 천국>이다. 우선 <시녀 이야기>는 디스토피아 소설인데, 디스토피아 작품으로 모임을 하면 무조건 재미있다는 믿음은 내 오랜 신조이기도 하다. 줄거리가 거창한 경우가 많아 소설 자체로도 할 이야기가 많고, 그 연장선으로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좋기 때문이다.


<영원한 천국>도 비슷한 이유로 장르 때문에 확신을 가졌는데, 이 책에는 SF적 장치가 들어있다. SF 장르라고 규정 짓기는 애매하지만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줄 요소로는 충분했다. 사람을 가상 공간에 업로드하는 이야기가 나와 가상 세계, 꿈과 같은 주제로도 긴 이야기를 나눴다. <시녀 이야기> 같은 디스토피아도 그렇고, <영원한 천국> 같은 SF도 그렇고 둘 다 ‘만약’을 이야기하기에 좋은 장르이기에 독서모임용으로 아주 탁월하다.

 

 

 

표현에 관한 다양한 해석



<흰>은 한강 작가의 책이라는 것 외에는 사전 정보가 전무한 상태로 책을 골랐는데, 사실 단상집에 가까운 책임을 알았더라면 (책을 즐거이 읽은 것과는 별개로) 독서모임용 도서로 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학적 표현과 감상에 집중한 독서모임은 많이 해보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들 똑같이 감동한 부분이나 각자 인상 깊었던 부분 등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흰’과 ‘하얀’ 등의 여러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관한 대화도 좋았다.


<시칠리아에서의 대화>에는 ‘모임 때문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읽지 못했을 책’이라는 공통 의견이 나왔다. 그럼에도 모임에선 열띤 대화가 이어졌는데, 특히 ‘모욕당한 세상’이라는 표현에 관한 상이한 해석이 기억에 남는다. 비문학을 읽으며 이해가 안 되거나 더 알아보고 싶은 부분은 검색을 해볼 수 있지만, 문학은 그러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궁금증을 다른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해결하다 보면, 이 정답 아닌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정말 즐겁다.

 

 

 

한 가지 주제의 변주



최근의 모임을 하며 배운 점은, 비문학 독서모임도 의외로 다양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이코패스 뇌과학자> 모임을 앞두고, 난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사이코패스 성향 캐릭터들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고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독서모임에서는 그런 이야기보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더 많이 나눠서 신기했다. ‘사이코패스’라는 명칭을 달 정도로 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도 인간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이 많은 책이라 더 넓은 이야기가 나왔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각각의 사례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리라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내가 책에 대한 불만을 한참 토해낸 시간을 제외하고는) 책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착취적/포용적 제도’와 ‘인센티브’의 개념에 관한 본질적인 의문이 우리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 나는 이제껏 문학에서 다양한 주제가 산발적으로 나올 수 있음을 당연하게 믿으면서도, 비문학은 저자가 지정한 주제 단 하나만이 다뤄진다고 생각했는데, 그 단 하나의 주제마저도 다뤄지는 방식은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Screenshot 2025-03-03 173655.png

<영원한 천국>(정유정, 은행나무) p.21

 

 

이번에 진행한 두 독서모임에는 또 한 가지 신기하고도 재밌는 우연이 있다. 바로 여섯 권 중 세 권이 작년 12월 초부터 이어진 ‘이 시국’과 묘한 관련성이 있는 도서라는 점이다. 셋 모두 이 시국 전에 선정한 도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녀 이야기>, <시칠리아에서의 대화>, 그리고 (제목부터 강렬한)<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이 세 권이 그랬는데, 지금을 경험하는 내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이 책을 이 시국이 아닐 때 읽었더라면, 다른 독서 경험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 세계의 나는 어떤 경험을 했을지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드림시어터’를 쓸 수 없는 만큼 비교해 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 순간의 나에게 필요한 책은 내가 고르지 않아도 항상 나를 찾아온다. 그게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어느 ‘업자’가 설계한 삶이어서인지, 인간의 직관이 스스로 필요한 부분을 취사선택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에 간택당한 집사는 그냥 주어진 책을 주어졌을 때 읽는 수밖에 없다.

 

 

 

image.pn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