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돌파구의 신작 ‘구미식’이 2025년 2월 21일부터 3월 2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서 상연되었다. 2024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작이다. 극의 배경은 가상의 지방 도시 구미시이다. 실제 구미공단에서 태어난 이홍도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자전적 요소가 일부 반영되어 있다. 가상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거쳐, 동시대 현실의 사회, 정치적 혼란에 거세게 도달하는 블랙코미디 연극 ‘구미식’을 본다.
작품의 주인공은 구미에 사는 한 청년 ‘톰 윌리엄스’다. 그는 동성애자이자 약물 중독자로 자주 환각 속에 있다. 그가 사는 구미는 극도로 보수적인 가상의 도시로 묘사된다. 극은 톰이 구미에 세워진 ‘행복한 동상’을 만나며 벌어지는 혼란을 그린다. 작품 속 구미는 ‘가상의 도시’이나 박정희가 태어난 곳도 경상북도 구미이고, 작품 속 행복한 동상은 ‘가상의 국가 지도자’를 모델로 삼고 있으나 박정희로 15 새마을운동기념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극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패러디한다. 구미식의 주인공 톰은 유리동물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고전 텍스트의 인물과 설정, 형식과 서사의 일부를 차용하는 방식으로 낯섦을 느끼게 한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구미시에 살고 있는 고전 희곡의 등장인물이라는 기본 설정부터 이질적이다. 더해, 톰의 환각이 만들어 내는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이 이리저리 교차되고 뒤섞인다. 인물들은 시간과 장소를 자유자재로 뛰어넘고, 이야기는 분절적으로 구성된다.
극의 흐름은 매우 혼란스러우나, 사회 풍자는 선명하다. 가상의 도시인 구미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사회라고 상정된다. 산업 근대화로 급속한 성장을 이룬 도시다. 그 배경에는 성장 제일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 경제 성장이 최우선이며 분배는 그 다음이다. 성장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 착취, 억압은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톰은 그런 사회에, 구미식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성적 지향을 감추고 클로짓 게이로 살아간다는 점, 아무도 찾지 않는 화장실의 맨 끝 줄 맨 끝 칸에 자신을 가두며 살고 있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일상적인 혐오와 폭력에 휩싸여 살아온 그에게는 차라리 약물에 중독된 채 꿈과 환각 속으로 빠져드는 편이 낫다. 조각조각 흩어져 부유하는 정신세계와, 자유를 갈망하는 내면세계를 붙들고 내내 방황하는 톰의 모습이 그려진다.
두 인물을 통해 풍자는 더욱 뚜렷해진다. 우선 톰의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일삼아 온 가해자다. 톰은 그를 찾아가 자신이 입은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말하지만, 때린 아이들이 워낙 많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염치없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종종 산만하게 굴거나 집중하지 않는 학생 정도는 괜찮았지만, 별나거나, 독립적이거나, 다수와 다른 행동을 하는 학생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교감은 성장이라는 단어 앞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마땅히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다. 톰은 그 폭력의 명백한 피해자다.
행복한 왕자 동상이 시사하는 바는 보다 격하고 직설적이다. 자신을 추종하고 상찬하겠다는 이들에게만 필요한 무언가를 나눠주고, 희생하는 주체는 자신임을 거듭 호소한다. 손에 박힌 루비와, 블루 사파이어 두 눈과, 온몸을 둘러싼 금박을 조금씩 나눠준다. 그리고 곧 동상은 계엄을 선포한다. 고문과 착취, 개인이 토해내는 피와 수많은 죽음은 그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극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추종자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구미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여기서 영원히 살아남겠다고 목이 터져라 외친다. 우상화의 형태로 권력자의 위선과 반인권적 횡포가 정당화되는 모습을 본다.
직설적인 풍자를 마주하며 현실을 무대에 투영하려 할 때쯤, 극은 의도적으로 몰입을 끊으며 수시로 혼란을 가중시킨다. 배우들은 갑작스레 극 밖으로 튀어나와 발단, 전개, 위기가 시작되는 지점을 안내해 준다. 무대 뒤편 스크린에는 난데없이 광고 팝업창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는 조명과, 우스꽝스러운 춤과 노래는 이야기의 맥락을 보란 듯이 끊어 낸다. 인물의 연기는 다른 배우가 촬영하는 휴대폰 카메라 화면을 통해 실시간 라이브 방송의 형식으로 스크린에 송출되기도 한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실험적인 이 시도들은, 더 이상 어떤 것이 허구이고 어떤 것이 사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세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효과적 방식이라 파악된다. 우리는 종일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영상과 이미지들 속에서 표류한다. 광고와 찌라시가 난무한 세상에서는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된다. 범람하는 미디어에 무의식적으로 잠식되기 쉬운 이 세상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탐구하다 취하게 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풍자를 통해 여전한 현실을 떠올리게 하고, 실험적인 방식을 통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체험하게 한다. 과거와 동시대를 적확하게 그려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금의 현실에서 곧게 살아갈 방법을 곡진히 탐색한 시도다.
연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마침내 도착합니다. 바로 이곳, 극장에.
사실이 허구를 만나는 곳, 현실이 이야기와 뒤섞이는 곳, 바로 극장에.
세상 모두가 말합니다. 현실은 그대로라고.
사실을 바꿀 수 없고, 현실이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그래서 극장이 필요하고 그래서 이야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작품의 온라인 프로그램북을 보면, 구미식의 초고는 2022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2024년 12월 3일에 일어난 일을 알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극이 되었다. 변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한 시대의 모습에 탄식하고 분노했으나 이내 생각했다. 이래서 연극이 필요한 것이구나, 라고.
한국 사회의 과거, 정치적 혼란, 선전과 선동, 맹목적 추종, 우상화, 그리고 그것들의 잔재를 연극만의 언어로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무대 위로 옮겨 놓는 행위. 사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를 텍스트화해 소리로 내뱉는 행위. 이 행위는 지금 이 시점에 적확히 필요한 투쟁이자 저항으로 작동한다.
연극의 마지막, 배우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의자들 앞, 무대 한가운데 놓인 의자가 있다. 불은 모두 꺼지고 텅 빈 의자 하나에만 조명이 비친다. 그렇게 관객은 극장을 나서기 직전, 질문의 주체가 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 주체가 된다. 권력, 위선, 폭력에 잠식되지 않도록, 부당하고 부조리한 것에 마땅히 저항하도록. 함께 질문할 수 있는 극장이라는 장소가 너무나도 달갑게 느껴지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