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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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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방학, 고등학생들이 보충 수업 교실에서 수학 강의를 듣고 있다. 열댓 명 중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 상태다. 몇몇은 수다를 떨고, 몇몇은 화장을 하고, 또 몇몇은 넋을 놓고 앉아있다. 수학 선생님은 한 손에는 부채, 한 손에는 분필을 든 채 아랑곳하지 않고 수업을 이어간다. 자연스레 학창 시절이 떠오르는 광경을 비추며 <스윙걸즈>는 시작한다.

 

창가에 앉아있는 ‘토모코’는 보충 수업이 몹시 지루하다. 야구부를 응원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학교 밖으로 향하는 밴드부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들을 따라 교실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마침 기회가 생긴다. 밴드부의 도시락이 학교에 뒤늦게 도착하고 토모코를 비롯한 학생들은 바쁜 점원 대신 경기장까지 배달에 나선다.

 

색소폰, 트럼펫, 트럼본, 드럼, 그리고 피아노로 이뤄진 스윙걸즈의 결성 계기는 다소 뜬금없다. 학생들이 배달한 도시락으로 인해 단체로 식중독에 걸리게 된 밴드부가 그 원인이다. 밴드부 중 홀로 도시락을 먹지 않은 ‘나카무라’만이 멀쩡하게 남아있다. 나카무라는 다음 야구부 경기에 함께 응원을 하러 갈 밴드 멤버들이 필요하다. 그렇게 토모코와 학생들을 불러 무작정 연습을 시작한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기는커녕, 대부분이 음치에 박치다. 악기 소리를 내는 기초 훈련이 급한 상황이다. 실력은 없지만 머릿수에 맞춰 얼떨결에 빅밴드 재즈를 결성한 그들은 좌충우돌을 겪게 된다. 스윙걸즈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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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걸즈>의 전개는 마치 만화 같다. 코미디의 연속이다. 학생들은 밴드부의 단체 식중독 때문에 그 자리를 대신하려 음악을 시작하게 된다. 어느 날은 우연히 농가에 피해를 끼친 멧돼지를 퇴치해 포상금을 받기도 한다. 트럼펫 벨 부분에서 튀어나온 쥐 덕분에 내내 실패하던 높은 음을 내는 데 성공하게 되고, 망가진 중고 악기를 가지고도 연주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는다. 연주회는 선착순으로 신청이 마감되어 참석하지 못할 뻔했으나 기적처럼 추가 참여가 결정되기까지 한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일들은 아니지만 비현실에 가까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연주회로 향하는 길이 일사천리다.

 

그러나 이 의도된 단순함을 지켜보는 과정이 당황스럽기보다는 꽤 즐겁다. 얼떨결에, 무턱대고, 대책 없이 시작하게 된 것들이 이야기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온다.

 

인물들은 입시나 연주회 수상을 목적으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박자는 어긋나고, 실수는 반복되고, 불협화음이 일상이다. 중고 악기까지 말썽을 일으키며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게 엉망이어도 무작정 나아간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첫 음을 내뱉고, 수십 번 수백 번 틀리더라도 하나의 곡을 끝마치는 순간이 즐거우니까 계속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는 힘. 이 뚝심 덕분에 부족한 개연성보다는 기분 좋은 에너지가 오래 남는다.

 

감정에 솔직한 인물들의 태도와 음악을 대하는 진정성 역시 빛난다. 초반부, 학생들은 트럼펫 소리를 내기 위해 며칠 동안 폐활량 훈련을 반복한다. 기간은 짧았고 대단한 목표를 성취한 것도 아니지만 다 함께 무언가를 이루려 노력했다는 행위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나 보다. 밴드부가 돌아와 갑자기 연습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눈물을 참지 못하는 얼굴들이 진심을 대변한다.

 

연습실에서 쫓겨난 뒤에도 재즈를 계속하려 일을 벌인다. 중고 악기를 마련하기 위해 마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연습할 공간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전전한다. 추운 겨울날에도 연주회에 보낼 오디션 영상을 찍겠다는 일념으로 눈밭에서 합주를 한다. 충분히 지칠 만한 상황임에도 두 눈을 반짝이며 재즈만을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마음을 내줄 수밖에 없다. 자연스러운 함락이다.

 

관객들은 무언가에 진심으로 임했던, 혹은 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학생들에게 대입하게 된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학창 시절이든 성인이 되고 나서든,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무언가에 진심을 다했던 시간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성취나 결실을 위해서가 아닌, 무의미하더라도 즐거우면 다라고 생각했던 순간. 근심과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땀과 웃음만이 새어 나오던 순간.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재즈 음악의 스윙을 연주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우리를 즐거운 기억 속으로 데려간다. 순수한 열정과 낙천적인 기운은 분명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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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토모코뿐 아니라 모든 인물들이 음악을 통해 변화를 겪는다. 경쾌한 음악 영화이자 사랑스러운 성장담이다. 토모코는 지루한 보충 수업과 공부를 잠시 떠나, 자신이 진정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을 찾아 나선다. 담당 악기인 심벌즈가 적성에 맞지 않아 품 안에 늘 탈퇴서를 지니고 있던 나카무라는, 우연히 빅밴드 재즈를 시작하고 나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재즈와 피아노를 향한 애정을 꾸준히 키워간다. 그리고 재즈를 짝사랑하는 초보자이자 레코드판 수집가에 불과했던 수학 선생님은 학생들 덕분에 용기를 낸다. 재즈를 배우고, 리듬을 익히다, 결국 연주회 지휘까지 하게 되는 모습이 절로 웃음을 자아낸다. 무언가에 몰두하는 순수한 열정은 나이를 불문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마지막 연주회의 클라이맥스 장면에 이르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열정의 에너지가 정점을 찍는다. 스윙걸즈는 폭설로 인해 연주회장에 지각하고, 코끝과 손끝이 발개진 채로 무대 위에 오르게 된다. 유니폼도 없이 제각각의 옷을 입고 악기를 튜닝하는 모습은 겉보기엔 프로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음악만큼은 훌륭하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재즈에 몰두해 온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다. 색소폰, 트럼펫, 트럼본의 화려한 독주, 일렉 기타의 강렬한 사운드, 피아노의 경쾌한 반주, 그리고 드럼의 리듬과 비트에 맞춰 온몸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객석 맨 뒤에서 뒤늦게라도 지휘를 시작하는 수학 선생님의 행복한 얼굴 역시 기분 좋은 인상으로 남는다.

 

학생들이 재즈의 리듬을 처음으로 깨우쳤을 때, 그들에게는 한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난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재즈로 들리게 된 것. 신호등의 신호음 소리, 탁구대에 탁구공을 튀기는 소리가 마치 재즈처럼 들린다. 그렇게 일상은 음악이 된다. 영화에 빠지면 일상 곳곳에서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게 되고, 춤에 빠지면 길거리 나무의 움직임마저 춤으로 보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게 된 사람의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방점을 찍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좋아하는 마음이 일으키는 변화. 이전에는 모르고 지나쳤을 작은 소리들과, 별것 아니었던 순간들을 새로 포착하게 되는 즐거움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인물들의 세상이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다.

 

중고 악기, 어설픈 실력, 미간이 자동으로 찌푸려질 만큼 불협하는 화음. 그럼에도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의 곡을 시작해서 끝마칠 수 있다는 완주의 기쁨을 느낀다. 영화는 악기의 값비싼 가격에서 오는 부담감이나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아 느끼는 갑갑함 등, 현실적인 감정들은 잠시 제쳐놓는다. 대신 완주의 기쁨을 다루는 데 집중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동안 곁에 있는 사람들과 즉흥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서툴고 부족하지만 같이 실력을 키워갈 수 있다는 것. 완벽하지 않더라도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함께 연주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기쁨을 발견하고 만끽하게 될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스윙걸즈>가 말하는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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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평소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던 관객이라면 반가운 얼굴들을 여럿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연인 토모코 역의 우에노 주리, 나카무라 역의 히라오카 유타 외에도 조연부터 단역까지 라인업이 알차다. 밴드부 부장으로는 타카하시 잇세이, 악기 판매점 점원으로는 에구치 노리코가 등장한다. 코히나타 후미요는 토모코의 아빠로서, 키노 하나와 오오쿠라 코지는 마트 매니저 듀오로서 코믹 연기를 선보인다. 현재 일본 연기파 주조연으로 자리 잡은 배우들의 20년 전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윙걸즈>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랑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품속에 내내 넣어뒀지만 결국은 제출하지 못한 밴드부 탈퇴서. 포상금으로 마련한 첫 중고 색소폰. 코트 주머니 속에 소중히 간직해 둔 오디션 테이프. 트럼펫에 행운의 부적처럼 달아 놓은 쥐 인형. 그 자체로 순수함을 상징하던 장면, 장면들이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다.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Nat King Cole의 재즈 팝송 L-O-V-E까지, 기분 좋은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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