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 한국에 가면 꼭 해야 할 일흔 네가지 일 중 당당히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늦게나마 허둥지둥 펼쳐본 코랄리 파르자의 흥행작. 그 이유를 단번에 알겠더라. 균형이 좋았다. 예술성과 산업성 두 개의 노른자를 모두 먹었달까. 고어물은 흥행하기 어렵다. 잔인한 장면을 '못' 보는 사람들을 감수하면서 밀어붙이기란 쉽지 않다. 스크린에 자극적인 요소가 난무하기에 핵심적인 내용을 놓치기도 쉽다. 뇌가 빨리 지쳐버린다. 그래서 핵심적인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고어물이 되기란 꽤 까다롭다. 다만 거꾸로 생각하면 또 이렇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알아들어 먹을 수 있는 메시지'는 고어물에서 날아다닐 수 있다. 서브스턴스가 그렇다.
외모지상주의, 특히 여성에 관한 루키즘이 신선한 주제는 아니다. 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너무 오래 냉장고 밖에 꺼내져 있어 집중 받기 어려워진 재료를. 코랄리 파르자는 SF적 요소와 독특한 연출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낸다. 세련된 사운드와 원색적인 색감의 활용, 직관적이고 다채로운 카메라 구도, 그리고 끔찍한 바디호러가 없었더라면. 관객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충분히 불쾌해하지 못하던 부분들에 멈춰 설 수 있도록 극대화한다. 새우의 껍질을 까서 게걸스럽게 뜯어 먹는 하비의 입을 천천히 보다 보면 엘리자베스의 척추를 가르고 태어난 수가 보이고. 그가 떠난 자리에는 먹지 않은 머리와 껍데기가 수북이 쌓여있다. 하비는 몸만 먹었다. 엘리자베스가 수의 인터뷰에 분노하며 칠면조를 손질하는 부분도 가히 명장면이다. 매끈매끈한 칠면조의 내장을 발라내기 위해 과격하게 손을 쑤셔 집어넣는 모습. 수의 각선미와 오버랩된다. 마치 그녀 또한 도마에 올려져 타인에 의해 요리되기를 기다리는 생닭과 다를 바 없다는 듯이 말이다.
스물다섯 살이 넘어가면 임신 하기 어렵다고 이야기는 하비는 엘리자베스와 동년배이다. 쉰이 되면 끝이라고 이야기하는 하비는 이미 쉰을 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당당히 회사에서 한자리를 하고 있는 하비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옛친구와의 저녁 식사에 참석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 여성을 성 상품화하여 착취하고 억압하는 남성 중심적 사회를 대변하는 하비가 역겨웠지만. 그의 말과 행동보다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엘리자베스의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서브스턴스를 통해 기껏 되찾은 젊음을 자신을 무참히 내친 곳에 다시 돌아가 투자하려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답답함을 빌린 속상함이 솟구쳐 올라오다가도,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그녀를 그런 방식으로만 사랑해 준, 젊고 예쁜 여성만이 가치 있다고 말한 모든 이의 책임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있다. 오래전부터 내려와 내 안에 자리 잡은 가부장제의 잔재. 몸을 바라보도록 스스로 훈련시켜온 방식. 그 왜곡된 시선이다.
저녁 약속을 위해 차려입은 엘리자베스는 거울을 보고, 전광판에 걸려있는 수의 모습을 보며 끊임없이 자신을 고친다. 더 생기 있어 보이기 위해 볼 터치를 찍어 바르고, 립스틱을 더 빨갛게 바르고, 가슴을 가리기 위해 스카프를 두른다. 계속 계속 본인을 고치고 고쳐도 성에 차지 않자. 끝내 얼굴을 마구 비비고 머리를 집어 뜯으며 폭발한다. 엘리자베스 안에 이미 하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속의 하비가 외친다. 너무 늙었어- 예쁘지 않아- 너는 더 이상 사랑 받지 못해- 라고. 영화를 보던 나와 동생도 엘리자베스와 똑같은 경험이 있다. 우리들 안에도 하비가 있다. 이 영화가 유독 대사가 적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더 이상 외부적이고 직접적인 개입이 없더라도, 이미 그렇게 훈련된 우리들은. 우리가 우리를 끊임없이 억압하고 착취한다. 마치 엘리자베스와 수가 서로를 끔찍이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가 더 많은 시간을 가져갈수록 엘리자베스의 몸의 일부는 점점 변질되고 부식되어 간다. 조바심이 나는 관객들은 서브스턴스 관계자처럼 생각한다. 욕심부리지 말고 균형을 지키면 되잖아-라고. 이 영화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미'의 기준을 너무나 어긴.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은. 흔히들 말하는 몬스터의 모습을 한 몬스트러스 수. 그녀를 세상에 내보이면서 맞이한 엔딩은. 자극적이고 파멸적이며 매우 슬프지만. 헷갈리게 만든다. 욕심부리다간 저렇게 된다는 건가? 피부가 다 부식된 엘리자베스, 그리고 몬스트러스 수 정도를 등장시켜야지만. 그제서야 관객들이 엘리자베스를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 미의 기준에 터무니없을 정도의 열등한 존재를 내세움으로써.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긍정'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위험하다. 비교군을 세워 만들어낸 그 긍정은 진정한 긍정이 아니다.
진정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칭찬'과는 먼 성질의 것이다. 그러니까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나 정도면 공부를 꽤 잘해-, 외모도, 성격도 평균 이상이지- 라며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니다. '잘해', '평균 이상이야' 같은 성취 중심적이고 비교를 통해 탄생하는 지표들. 당장은 내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느끼게 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내가 나이가 들어 외모가 바뀌고 성격도 변한다면. 그렇게 꾸역꾸역 부여해 둔 가치는 한 번에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여전히 사랑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이고 강한 사랑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엘리자베스와 수의 핏빛 욕망이 불러일으킨 재앙. (그 재앙이 '아름답지 않은' 몬스트러스 수로 표현된 것도 위험하지만) 그중에서도 그 핏빛 욕망만을, 핏빛 욕망이 생겨난, 생겨나도록 한 그 원인과 배경을 정확히 그리고 깊이 쳐다봐야 한다. 서로 죽이려 달려드는 엘리자베스와 수를 보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들이 있다. 너네끼리 그렇게 싸워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너희가 정말 싸워야 할 것은 따로 있잖아. 서로 죽여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너희 안의 하비를 깨닫고 끊임없이 경계해야만. 그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하비가 없을 정도로 죽여놓아야만. 마침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