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매 맞을 것이 조금 걱정되지만, 일단 밝힌다. 나는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특히 배가 고프지 않을 때는 빵 냄새도 싫어한다. 지하철역에 있는 빵집 앞을 지나가면서 숨을 참을 때도 많다. 그 탓에 ‘갓 구운 빵 냄새’가 풍기는 (관념적) 동네 빵집을 성공적으로 상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에게 빵집은 고소하지도, 달콤하지도, 포근하지도, 따스하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이 연극이 더 궁금했다. <동백당; 빵집의 사람들>은 ‘해방 직후’라는 시대의 암울함을 ‘빵집’이라는 공간에서 나오는 힘으로 이겨낼 예정인 듯한데, 그 힘이 과연 나에게도 전달될 것인가. 나도 빵집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위에서 말했듯 극의 배경은 해방 직후의 동네 빵집 ‘동백당’. 동백당의 기둥은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큰사장님의 두 아내이다. 사이가 안 좋을 법도 하고, 실제로도 많이 싸우지만,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각각 동백당의 사장과 수석 제빵사를 맡아 빵집을 굴린다. 동백당 문을 닫아야 할 위기가 찾아와도 둘은 의기투합하여 동백당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극의 초반에는 누가 큰사모님이고 작은사모님인지를 두고 다투지만, 극이 끝날 때 남은 것은 사장과 수석 제빵사, 두 사람이다.
일반적인 공연과 달리 <동백당>은 무대를 가운데 두고 그 양쪽에 객석이 자리한다. 맞은편에 다른 관객들이 앉아 있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 처음에는 서로 얼굴이 보이는 게 민망하거나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본 공연이 시작되자 조명이 어두워져 관객석으로는 눈이 가지 않기도 했고, 곧장 몰입이 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런 무대 형식을 사용한 덕에 관객은 외부인이 아닌 마을 사람으로서 극을 관찰하게 된다. 정면이랄 것이 없는 무대 구성인지라 배우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때로는 아쉬웠지만, 이 점 때문에 더욱 실감 나는 현장이 완성된 것 같기도 하다.
연극 <동백당>을 보며 의외로 매력적인 소품을 하나 배웠는데, 바로 자전거다. 자전거는 교통수단이 덜 발달한 시대 배경과도 잘 어울리는 데다가, 시공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데도 유용했다. 드물게 단차 없이 넓은 평지 무대를 가진 만큼 그 공간을 자유롭게 타고 다니기만 해도 이 인물이 지금 마을 전체를 쏘다니고 있음이 느껴졌고, 자전거가 움직이는 동안에도 다른 인물들이 부산스레 이야기하는 소리를 얼핏 들으면 시간의 흐름이 와닿았다. 굳이 배경 소품을 바꾸거나 ‘며칠 후’ 같은 대사(또는 자막)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렇게 직관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했다. 특히 뒷바퀴 전체를 들어 올리는 킥스탠드를 사용해 제자리에서도 자전거를 탈 때 맞는 바람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극의 부제부터가 ‘빵집의 사람들’이고 빵집 운영에 참여하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등장인물도 꽤 많다. 주인공은 변함없이 사장과 제빵사가 맞겠지만 ‘스토리 속에서 얼마나 성장했느냐’를 기준으로 주인공을 다시 찾아본다면, 사장의 아들이자 ‘유학파 백수’로 소개되는 ‘산’이 당당히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산은 당시로는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데다가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비관주의에 빠져 더 이상 글도 쓰지 않고 술만 퍼마시는 한량이다. 초기에는 동백당을 되살리려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 찬물을 뿌리고 다니는 얄미운 인물이지만, 절대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굳게 뭉치는 이들을 보며 차츰 변한다. 생각을 바꾼 뒤에는 되레 가장 적극적으로 변해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극의 중심 메시지를 전하는 대사들이 대부분 산에게 향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팍팍한 현실에 지쳐 무기력해진 현시대의 우리들을 나타내는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
러닝타임이 꽤 길지만 반죽을 치대는 과정에 율동을 더해 신나게 만들거나, 작중 시식회를 가지는 장면에서 실제로 관객들에게 치즈케이크와 빵을 나눠주는 등의 퍼포먼스가 있어 지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사실 극을 보는 도중에는 치즈케이크의 역할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치즈케잉크는 제빵사의 야심작이자 동백당을 살릴 비장의 무기로 처음 등장했지만, 치즈가 익숙하지 않던 시대인지라 (시식할 수 있었던 관객들만 즐겁고) 실제 손님을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거쳐 갈 역경이 필요해서 이 에피소드를 넣었으리라고 짐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삭제하고 러닝타임을 줄이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치즈케이크의 진짜 역할은 극의 마무리에서 나온다. 동백당이 잘 자리 잡았으니 이제 모든 이야기가 끝났으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사장과 제빵사는 지금의 다음을 향해 움직인다. 동백당은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이 두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치즈케익의 맛을 알리기 위해 다시 도전하러 떠난다. 그곳에서는 또 어떤 마을 사람들을 만나 어떤 빵집을 만들까 궁금해진다. 아마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궁금해한 빵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