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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다들 한번쯤은 들어봤을 그리스 로마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그리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하데스에게 끌려간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한 오르페우스의 여정. 따라서 극의 결말 역시 우리가 아는 신화와 동일하다. 지하 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가는 대신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걸린 시험에서 오르페우스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보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문은 다시 닫히고, 오르페우스는 영영 에우리디케를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어찌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힘이 쫙 빠지는 엔딩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관객들이 하데스타운 작품을 찾는다.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하데스타운의 매력은 무엇일까.

 

 

 

#우리는 에우리디케를, 그리고 오르페우스를 비난할 수 있는가


 

하데스타운이라는 작품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인간이다.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과 똑같은 인간. 그렇기에 이들은 누구보다 입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래 실컷 비난해

도덕이라 죄악이라 너라고 달랐을까?

똑같은 처지라면

배가 부를 때나 원칙이 중요하지

- Gone, I’m Gone (난 떠나)


신화에서는 뱀에 물려 죽은 에우리디케가 지옥으로 가게 되지만, 뮤지컬에서는 배고픔에 지친 에우리디케가 직접 하데스타운으로 향한다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과연 오르페우스를 두고 떠난 에우리디케를 잘못했다 욕하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보잘것없는 날

그녀가 춥고 어두운 이 길을 따라오리라 믿었나

- Doubt Comes In (의심이 찾아들어와)


하데스의 마음을 돌리고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지상으로 돌아가게 된 오르페우스. 하지만 거기엔 하나의 조건이 붙는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보다 앞서서 걸어야 하며, 절대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상세계로 돌아 가는 길은 멀고, 춥고, 어둡고 험난하다. 뒤를 볼수도 목소리를 들을수도 없이 오로지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에 기대야만 했던 오르페우스에게 의심이 찾아든다. 작품은 지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쉽지 않은 길인지 연출로 잘 보여준다. 갑자기 차가워진 공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내면을 담은 듯한 운명의 여신들의 스산한 노래. 숨을 참은 채로 오르페우스의 걸음을 따라가다보면 그가 의심을 품게 되는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고, 마지막 한 발을 앞두고 뒤를 돌아보는 장면에서는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왜 뒤를 돌아봤냐며 화를 낼 마음 같은 건 들지 않는다. 오로지 안타깝고 안쓰러운 감정만이 강하게 몰아칠 뿐이다.

 

 

 

#우리는 왜 벽을 세우는가


 

이 작품에서 지하세계, 지옥, 하데스타운, 광산은 모두 같은 장소를 가리킨다. 신화에서 죽음의 신 하데스가 관장하던 지옥은 뮤지컬에서 자본주의적 착취가 담긴 광산이라는 곳으로 재해석되었으며 하데스는 이곳의 주인이자 자본가로 그려진다. 신과 인간의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으로 표현된다. ‘벽’을 넘어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이곳은 외부와 고립되고 단절된 공간이다. 이곳의 일꾼들은 자신들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채로 타인의 말은 듣지도 않으며, 머리를 잃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같은 일만을 반복할 뿐이다.


우리는 왜 벽을 세우는가

자유롭기 위해서지 그것이 벽을 세우는 이유

저 장벽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장벽이 적을 막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그것이 벽을 세우는 이유

우리의 적은 누구지

가난이 우리 우리의 적이지 적을 막아내기 위하여

- Why We Build The Wall (우리가 벽을 세우는 이유)


하데스는 가난이라는 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벽을 세웠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일시적 안전을 얻기 위해 근본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자들은, 자유도 안전도 가질 자격이 없으며 결국은 둘 다 잃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데스타운 일꾼들의 모습은 자유롭기 위해 자유를 포기한 듯한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벽에는 귀가 있는 법


 

1막의 마지막 넘버 ‘Wait For Me’에서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들은 장벽은 눈물을 흘리며 길을 열어주었고 오르페우스는 하데스타운에 도착했지만 계획대로 에우리디케를 데려갈 수 없음에 좌절한다. 오르페우스의 울부짖음은 일꾼들을 깨어나게 한다. 내가 누군지조차 잊어버린 채 머리를 잃지 않게 허리를 숙이고 착취당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오던 일꾼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처지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곧 오르페우스와 연대하여 하데스에게 저항한다.


돌아가려 몸을 돌렸죠 듣는 이가 없을 줄 알고

하지만 벽에는 귀가 있는 법 일꾼들도 들었네

같이 있다고 믿어

혼자인 누구보다 함께인 우릴 믿어

- If It’s True (그게 진실이면)


그렇게 굳건한 줄 알았던 장벽에도 틈이 있었다. 벽은 물리적으로 경계를 만들며, 이는 단절된 공간으로 외부의 것이 들어올 수 없게 함과 동시에 내부의 것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벽이란 공간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질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극 중 오르페우스와 같은 누군가의 작은 시도로 벽을 사이에 둔 사람들은 소통을 하기 시작하고 결국 진실을 밝혀낸다. 벽이 이들의 노래를 듣는 순간 이들은 하나가 됐으며 더 이상은 힘없는 혼자가 아닌 누구보다 강한 ‘함께’가 된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만들어낸 변화


 

이들의 저항은 결국 오르페우스의 의심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저항이, 혁명이, 시도가 과연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일까? 하데스타운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성공이나 실패를 떠나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실패라는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노래가 어떤 희망을 주었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는지에 집중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을지언정 그의 노래는 자기 스스로를, 에우리디케를, 지하 광산의 일꾼들을, 그리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다시 노래하면 된다는 수 있는 희망을 전해 준다.

 

 


#중요한 것은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하데스타운으로 돌아가며 둘은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이게 이야기의 끝이다. 그러나 하데스타운에는 아직 한 장면이 더 남아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무대는 다시 시작의 그 모습으로 돌아온다. 헤르메스의 다음 가사와 함께.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다시 부르리라

중요한 것은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 Road To HellⅡ (지옥으로 가는 길Ⅱ)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들의 노래는 다시 시작된다. 모든게 첫 장면과 똑같다. 그러나, 어딘가 묘하게 달라졌다. 오르페우스의 카네이션이 에우리디케의 가방에서 나오고, 에우리디케를 바라보는 오르페우스의 눈빛이 뭔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원래도 알고 있었던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애틋한 눈빛. ‘만난 적도 없는데 왠지 익숙한 느낌/그댈 알고 있었다는 확신뿐’이라는 가사가 심장을 쿵치고 지나간다. 이들의 모습에 조금의 기대를 품게 된다. 이번엔 정말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약간의 바람이 섞인 기대를.

 

실패한 결말임에도 다시 찾게 만들고 여러 번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은, 이 작품에 스며있는 한 줄기의 작은 희망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바란다. 수없이 반복되는 노래 속에서 언젠가 이들의 결말이 조금은 달라지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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