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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햄릿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이 대사. "To be, or not to be(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비극적인 인생 속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너머를 이야기하는 기다란 독백의 시작을 알리는 이 대사는 햄릿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극, "플레이위드 햄릿"은 이 혼란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치열하게 갈등하던 햄릿은 여러 명의 자아로 분열된다. 사느냐 죽느냐를 다투는 두 명도 아니고 네 명으로. 하얀 옷을 입은 이 네 명의 햄릿은 이미 오래전 죽고 무대를 떠돌고 있는 유령 같기도 하다. 유령들은 메아리처럼 묻는다. 너무도 비극적이라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도 꼽히는 이 인생에도 가치가 있나. 죽어야 할까, 살아야 할까.

 

 

2025플레이위드햄릿_포스터_수정.jpg

 

 

 

죽은 아버지로부터의 전화


 

극은 혼자, 아니 네 명의 햄릿이 있는 방 안으로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시작한다. 죽은 아버지의 혼령은 전화를 걸어 본인의 복수를 해줄 것을 종용한다. 자신을 죽인 동생, 왕위를 찬탈한 동생, 부인을 빼앗아 간 동생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고. 이때부터 햄릿은 네 명으로 분열한다. 이 전화는 진짜일까? 힘든 상황에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한다. 돌림노래처럼 시간차를 두면서. 이 혼령인지 환청인지 모를 목소리의 마지막 말은..

 

 

Adieu, Adieu, Remember me.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외침이다. 자신이 존재했음을 잊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소망. 그리고 그 의지를 이어 나가달라는 부탁. 자신의 것이 아닌 의지를 이어 나가게 된 햄릿은 혼란스럽다. 이것이 본인의 의지인지, 아버지 혼령의 의지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네 명의 햄릿은 그렇게 서로 머리를 맞댄다. 이 혼령이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정원사를 탐문하고 삼촌을 감시한다. 이 과정은 다소 코믹하게 그려진다. 중간중간 백 텀블링도 선보이고, 프리즈도 곁들이며. 이들의 고민을 아주 옛날의 햄릿 왕자의 고민이 아닌 호레이쇼, 즉 관객의 친구가 하는 고민으로 보다 친근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유령의 전화를 받은 햄릿_photo by 오승환.jpg

 

 

이렇게 코믹하게 그려지던 네 명의 햄릿 사이의 갈등은 그 유명한 대사에 이르러 조금은 진지해진다. 독백이던 대사가 서로 주고받는 대사가 되면서 대사는 그 층위를 더하며 긴박해진다. 한 자아의 여러 고민이 시각적으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한다. 죽을까? 살까? 죽음 다음은 뭘까? 죽음 다음이 그냥 끝없는 잠이라면 이런 삶을 이어갈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그 꿈이 끝나지 않는 악몽이라면? 네 명의 햄릿이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중얼대는 장면은 마치 조현병 환자의 중얼거림처럼 조금 섬뜩하기도 하다.

 

 

 

네 명의 배우가 선보이는 다양한 역할


 

이번 공연에는 네 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 올랐다. 햄릿 핑크, 신윤재 배우와 햄릿 그린, 서성영 배우. 햄릿 앰버, 김영욱 배우와 햄릿 다크, 이상홍 배우.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경향성은 보이는 것 같았다. 신윤재 배우는 가장 젊고 감수성이 풍부한 햄릿이다. 무엇보다 노래를 잘 부른다. 서성영 배우에게는 충동성이 보인다. 김영욱 배우는 햄릿이 고뇌하는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신중한 성격을 대표하는 걸까. 가장 눈에 띄었던 배우는 이상홍 배우. 이 배우는 극에 전체적인 무게감을 부여한다. 스니커즈를 신고 기타를 치는 모습과 크게 소리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햄릿의 삼촌, 왕의 역할을 많이 해 햄릿인지 왕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02다크_이상홍.jpg

 

 

이처럼 네 명의 배우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햄릿은 다른 역할을 함께 연기한다. 가발을 던져 가발을 받은 배우는 오필리아를, 지팡이를 던져 지팡이를 잡는 배우는 클라우디우스 역할이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죽은 햄릿의 유령이 보여주는 환영이라고 생각한다면 납득이 된다. 마찬가지로 죽은 혼령이 왕이 되었다가, 왕비가 되었다가, 자신이 짝사랑하는 상대가 되었다가 하며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다. 혹은 이들이 실존했던 햄릿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면 개인이 가지는 그 수많은 인격들이 타인에게도 존재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햄릿이 재현하는 다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햄릿의 생각은 여러 배우들의 연기로 여러 각도에서 조명되지만 클라우디우스나 오필리아, 혹은 햄릿의 어머니는 한 명의 배우의 연기로만 표현된다. 타인이 바라본 타인이라는 것은 결국 한 가지 시선으로 해석되기 마련이고 그것이 여러 매체들에서 조연이 주연보다 평면적으로 그려지는 이유다. 연극은 특히 그 비중의 차이가 심하게 나기에 주연이 아닌 인물들의 이야기는 크게 축소된다. 예를 들어, 오필리아의 오빠는 원작에서 결투의 마지막에 오해를 풀고 햄릿과 화해하지만 연극에서는 이 과정이 자세히 그려지지 않는다.

 

 

 

호레이쇼, 너는 날 기억해 줄 거지?


 

그리고 한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그 많은 역할을 소화하던 배우들이 소화하지 않은 다 하나의 배역, 바로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다. 호레이쇼는 철저하게 청자의 역할을 하며 때로는 햄릿의 선택에 개입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관객들을 보며 죽을지 살지 결정해달라고 네 명의 햄릿이 함께 중얼거릴 때.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면 엄지를 올리고, 죽어야 한다면 엄지를 내리라고 요청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지를 올린 관객이 더 많았기에 극은 계속 진행되었지만 만약 엄지를 내린 관객이 더 많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은 마치 연극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친한 친구도 본인의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생의의미를 잃듯 관객이 더 이상 지속되지를 않기를 바라는 연극도 의미를 잃는다. 물론 응원받지 못하는 인생도, 관객이 없는 연극도 지속될 가치가 있지만 말이다.

 

 

아아, 이렇게 될 줄 몰랐던 

아름다울 줄 알았던 나의 젊은 날은 피지 못한

인생 참 꽃같네. 

 

미련한 내 인생을 옆에서 훑어본 내 친구여, 

각박한 세상에 너라도 날 기억해주오. 

 

아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호레이쇼, 넌 날 기억해 줄 거지?

 

 

그러니까 햄릿의 인생에서 관객은 친구, 호레이쇼다. 원작 햄릿에서 햄릿의 친구였던 호레이쇼는 이 모든 진실을 전해주기를 부탁받는다. 마찬가지로 커트콜에서 햄릿은 '친구여'라고 관객을 부르며 본인의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준다. 그리고 묻는다. '호레이쇼, 넌 날 기억해 줄 거지?' 기억해주는 것을 넘어 이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무언의 의지가 전해진다.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연극의 시작에서 걸려 왔던 한 통의 전화. 그 때 아버지의 혼령이 남겼던 말. 'Remember me.'  본인의 복수를 대신 해주기를 바랐던 햄릿의 아버지처럼 햄릿도 본인의 이야기가 이곳에서 끊기지 않기를 원한다. 구슬픈 멜로디언과 기타의 선율, 젬베의 소리와 어우러진 가사가 전하는 것은 결국 햄릿의 의지다. 이 슬픔이 여기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의지. 연극이 모두 끝나고 조명이 켜지기 전, 전화벨 소리가 따르릉 울렸던 것은 관객석에 앉아있는 호레이쇼에게 전할 말이 있었던 햄릿에게 걸려온 마지막 전화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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