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에 감정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마침 4차 산업혁명으로 기술의 패러다임이 바뀐 요즘,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본다. 이미 다양한 AI 모델과 로봇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영화
도움, 그 이상의 모성애를 느끼다
이 영화는 피터 브라운의 장편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우연한 사고로 거대한 야생에 불시착한 로봇 '로즈'는 주변 동물들의 행동을 배우며 낯선 환경 속에 적응해 가던 중, 사고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기 기러기 '브라이트빌'의 보호자가 된다. ‘로즈'는 입력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역할과 관계에 낯선 감정을 마주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남쪽으로 떠나야 하는 '브라이트빌'을 위해 동물들의 도움을 받아 이주를 위한 생존 기술을 가르쳐준다.
인간을 ‘돕는다’라는 것으로만 프로그래밍 되어있던 로즈는 브라이트빌을 만나 그 이상의 가치를 배운다. 세상을 처음 만난 아기 기러기의 전부가 되어, 먹고 날아오르는 것을 하나씩 알려주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도움이라는 것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그 깊숙한 곳에는 아기 기러기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이 녹아있었다. 그런 성장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로즈는 느껴본 적 없는 심장의 열기를 오롯이 경험한다.
공동체로 향하는 배움
영화 <와일드 로봇>의 명장면을 하나 꼽아보자면, 단연 브라이트빌, 그리고 기러기 떼가 한 방향으로 날아가고, 로즈도 그쪽으로 힘껏 뛰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자연의 장엄한 이치를 엿보는 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웅장함이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진다.
로즈는 아기 기러기, 브라이트빌이 무리와 완벽히 어우러져 도태되지 않으며, 함께 잘 살아남을 수 있게 다양한 생존 방법을 알려주었다. 살아남기 위한, 자연의 이치는 바로 이 ’공동체‘에 있다. 처음 낯선 땅에 남겨진 로즈가 숲속을 오가며 동물들과 소통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초반까지만 해도, 로즈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동물들이, 지속적인 소통으로 마음을 열고 로즈를 수용해 함께하게 된다.
그렇게 숲에도 겨울이 찾아오게 된다. 모든 동물은 겨울이 되면 각자의 터에서 겨울잠을 자게 되는데, 로즈는 이들을 ‘하나’로 모았다. 따듯한 불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이고 인류와 공동체가 진화했던 것처럼, 큰 굴 안에서 불을 피우고, 그 온기로 생명력을 나누는 ’연대‘를 실현한다.
특히 이 ’연대‘는 단순히 모인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힘‘이 된다. 천적을 만났을 때 둥글게 원을 만들고 힘을 합치는 펭귄들의 모습으로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다. 로즈를 다시 본부로 데려가기 위해 외부 세력이 숲을 침공하고 불태우자, 너나 할 것 없이 동물들은 그 자체로 하나가 되어 대항한다. 웅크림 대신 기지개가 겨울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것이 관람객에게도 색다른 감동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과 한편이 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영화를 지켜보는 내내 관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죽여 응원하고 있다.
자연과 로봇, 이상적인 공존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렇다면 영화의 제목은 왜 <와일드 로봇>일까? 와일드(Wild)라는 단어에는 ’자연 그대로의, 사람이 손대지 않은‘이라는 뜻이 있다. 이에 덧붙여 사람이 만들어 낸 ’로봇‘이라는 단어를 낯설 듯 하나로 연결한 모습은, 전혀 다른 두 단어에서 새로운 가치가 태어나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와일드 로봇>을 관람하다 보면, 자연 속으로 로봇이 스며든 것인지, 자연을 로봇 안에 품은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동물들과 함께하는 로즈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로봇과 자연이 어우러진다는 영화의 이런 설정은 다른 요소들보다도 가장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다. 인류가 이 세상에서 진화를 거듭할수록, 여러 차례의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구 온난화와 환경 오염 등, 우리가 보고 자라왔던 삶의 터전이 자연스럽게 망가지거나 오염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기술이 집약적으로 발전하며 챗 지피티, 딥시크 등 AI가 크게 떠오른 4차 산업혁명도 이런 양면적인 피해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딥페이크 범죄 등, 기술의 발전에 비례해 윤리 문제가 떠오르고 있는 지금, 반드시 마주하게 될 상충점을 영화 <와일드 로봇>속에서 살며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마지막 로즈와 브라이트빌이 머리를 맞대고 감정을 나누는 장면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기계화된 로봇이 모성애를 느끼고, 공동체의 힘을 알아가며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연대로 자연을 하나로 모은다. 우리가 이곳에서 생존하기 위한 이유인 감정 교류, 그리고 공동체. 영화는 그것들로 ’사람이 손대지 않은 것‘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 그 둘의 가치를 잘 조화해 공존해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주는 듯싶다. <와일드 로봇>은 피터 브라운의 그림체로 단호하지만은 않게, 관객들을 부드러운 메시지로 끌어안아 설득하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넘어서, 공동체와 상생에 누구보다 진심으로 다가섰던 로즈. 브라이트빌과 함께한 한 편의 영화가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의 삶 같기도 해서 더더욱 깊게 여운이 흐른다. 멀지 않은 언젠가, 가을이 깊게 드리운 갈대밭에서 로즈와 브라이트빌이 힘껏 날아오르고 있을 것만 같다. 그 자유롭고 조화로운 풍경을 떠올리자니 마음이 물을 머금은 듯 한껏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