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순은 손녀의 결혼식 대신 학수의 49재에 가길 원한다.
무료했던 어느 오후, 나를 단숨에 영화관으로 이끌었던 한 영화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소개글 한 문장이다. 이 단순명료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담겨있을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갔던 동네의 작은 영화관에서 몇 안 되는 관객들과 함께 관람한 독립영화 ‘첫여름’. 3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한순간을 영순의 시선에서 냉철하고도 담백하게 담아냈다.

결혼식과 49재 - 삶과 죽음
“결혼할 사람은 무조건 너를 즐겁게 해야 한다.”
- 영화 <첫여름> 中 영순
영화의 줄거리처럼, 주인공 할머니 영순은 ‘결혼식’과 ‘49재’ 그 가운데 경계선에 있다. 두 선택은 무척이나 대비된다. 결혼식은 누군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만, 49재는 삶을 마감한 고인을 추모하는 장례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 소재는 영순의 내면에서도 대비되고 있다. 결혼식을 앞둔 손녀에게는 함께 있으면 즐거운 배우자와 결혼하라는 조언을 해준다. 손녀에게 있어서 순간의 선택이 앞으로의 삶에 있어 중요함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험에서 비롯되어 영순이 영순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리 맞춰둔 한복을 입어보는 영순에게 그녀의 딸이 어울리는 헤어핀을 꽂아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시작을 앞둔 손녀와는 달리 자신의 삶은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 듯, 생기를 잃은 영순의 모습이 거울 너머로 보인다.
영순에게 '죽음'이란
어쩌면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타인의 선택으로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반려자이자 남편의 이야기로 얼핏 짐작해 볼 수 있다. 남편은 영순을 이름 대신 “어이”라고 부르며 무심하고 무뚝뚝하다. 또 지병을 앓고 있어 요양병원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의 대소변을 갈아주던 영순이 화장실에서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이때 자신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아무것도 없는 듯한 공허한 공기만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결국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남편과 차에 함께 탄다. 출발하기 전, 남편은 잠깐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영순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힘겹게 몸을 부축해 휠체어로 옮겨 거동을 도와준다. 이때 두 사람이 화장실로 향하는 길목은 꽉 막힌 연출로 답답함을 더했다. 앞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는 휠체어가, 뒤에서는 지나가려는 자동차가 있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다. 오래전부터 죽음이나 다름없었던 영순의 마음을 대변하듯 하다.
영순에게 '삶'이란
매 순간이 모여 현재가 만들어진 것처럼, 영화는 그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삶은 곧 선택으로 점철된 모든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나의 모든 의지가 삶, ‘살아있음’으로 이어진다. 결국 영화에서 영순은 딸이 꽂아준 헤어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단숨에 빼버리고 만다. 그 대신 만지작거렸던 ‘나비 브로치’는 영화의 주요 오브제로 등장한다. 죽음에서 삶으로 날아가고 싶은 나비 같은 소망이자 영순의 진짜 목소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잠시 영순의 과거로 떠나야 한다. 친구와 찾은 댄스클럽에서 실수로 떨어뜨리고 만 브로치를 학수라는 남성이 주워준다. 그렇게 연이 닿은 두 사람은 댄스클럽 안에서 춤을 추며 더욱 가까워지는데 어둠이 짙게 깔린 방에 함께 누워 발로 장난치고 대화를 나누던 중 영순의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나는 어떤 여자일까? 나는 음악 소리만 나오면 춤추고 싶어. 성미가 그래.”
- 영화 <첫여름> 中 영순
이 대사처럼, 영순은 음악, 그리고 춤으로 ‘즐거움’ 그 자체를 느끼고 있었다.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고 손녀에게 조언한 자신의 말대로라면, 영순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학수 그리고 그의 49재에 가는 것이다. 다시 댄스클럽으로 돌아와 직접 손에 든 나비 브로치를 옷깃에 꽂고 당당하게 춤을 추러 나서는 영순의 뒷모습. 누군가에 의한 헤어핀이 아니라 자신에게 비로소 주어진 첫 선택. 그 순간만큼은 단단하고도 자유로워 보였다.
여름은 ‘열다’의 명사
원래 영화 ‘첫여름’은 손녀의 시선에서 괴상한 할머니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영순의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았고, 그녀를 중심으로 과감히 수정됐다. 덕분에 영화는 영순이 ‘즐거움’이자 ‘삶’ 그 자체인 곳으로 향하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결말은 주인공이 자신을 둘러싼 벽의 문을 스스로 열도록 이끈다. 아니, 어쩌면 곧 감독과 관객들이 가지고 있던 벽까지 허무는 역할을 한다.
허가영 감독에게 그런 벽이란, 기존 ‘노인’에 갖고 있었던 고정관념이었다. 이 영화는 춤을 사랑한 외할머니와 나눈 그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감독이 그 대화에서 느낀 점은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에 집단 내의 개개인의 삶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우리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령층 등 사회 속 특정 집단을 마냥 약자라고만 인식해 오지 않았던가?
다시 서론의 소개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영순은 손녀의 결혼식 대신 학수의 49재에 가길 원한다] “영순은 원한다.” 몇십 년 동안 웅크리고만 있었던 생명이 새로 깨어나는 듯, 이 문장 하나로 영숙의 여름이 열렸다. 영순처럼, 누군가는 고군분투 끝에 작은 불씨를 피워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못다 핀 소망을 여전히 품고 있다.
‘첫여름’은 전자를 가만히 조명하며 후자에게 꼭 처음으로 열리고 싶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