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철수는 저수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는 지독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힌 채 살만 찌고 있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철수가 유일하게 열정을 갖고 몰두하는 일은 ‘글쓰기’다. 온라인에서 만난 친구인 영희와 서로의 작품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던 중 철수는 그녀로부터 멸종 위기인 ‘인어 부자(父子)’를 주인공으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쓰게 된 인어 부자(父子)의 이야기로부터 철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연극 <저수지의 인어>가 오는 2월 1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한다. ‘2024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으로 선정되기도 한 이번 작품은 현실, 온라인 공간, 이야기 속 가상의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허무와 외로움, 실체 없는 불안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처음 글을 썼던 때를 떠올린다. 시작은 중학생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인터넷 강의를 수강했는데 해당 사이트에는 학생들이 시나 소설, 수필 등을 쓸 수 있는 커뮤니티 같은 공간이 있었다. 한동안 눈팅만 하다 심심풀이로 습작 몇 편을 써서 게재했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그 취미를 벌써 십몇 년째 이어오고 있다. 물론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마음가짐은 좀 달라졌다. 그때는 공부하기 싫은 학생의 일탈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운동 같은 거다. 특별히 바라는 건 없지만, 막연히 쓰다 보면 언젠가는 그 결말을 마주하지 않을까 싶은. 그렇다면 <저수지의 인어> 속 인물들에게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
극중 등장하는 인물들은 항상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철수가 그랬고, 영희가 그랬다. 하다못해 철수의 아르바이트 동료인 경태도 처음 뵌 철수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와 고민에 대해 털어놨고, 철수의 아버지 역시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두었다가 철수가 퇴근하면 들려주곤 했다.
이때 등장하는 각각의 이야기에는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일례로 철수는 아버지에게 저수지 근처 유원지에 사는 거북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거북이는 햇빛도 쬐지 않은 채 얼음 밑에서 하루 종일 몸을 웅크리고 지냈다. 보다 못한 철수가 거북이를 깨우면 거북이는 겨우 고개만 내밀어 잠깐 위를 올려다 보고는 다시 등껍질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철수는 무릇 살아있는 것들을 움직여야 살 수 있다며, 햇빛을 보고 살아야 한다며 걱정했다.
사실 철수가 이 이야기를 들려준 건 집안에 틀어박힌 채 라면과 술로 살만 찌우던 그의 아버지를 겨냥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영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극중 영희가 처한 현실도 철수 못지않게 버겁다. 주변에 기댈 곳 하나 없는 그녀는 외로울 때마다 온라인 채팅에 접속해 낯선 남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오늘 뭐 했어요’같은 형식적인 말들을 나누며 잠시나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속에서 딱 얼어 죽지 않을 만큼의 온기를 느끼며 하루를 버텼다. 철수의 걱정에 잠시나마 고개를 내밀어 쬔 한 줌의 햇빛으로 다시 냉기를 견디던 거북이처럼 말이다(실제로 극중 영희는 ‘이제 저 위를 올려다보는 일은 지쳤다’며 울먹이는데 그 모습은 얼음 밑에 웅크린 거북이를 연상시킨다).
이외에도 극중 아버지가 이웃집 개가 자신의 닭을 잡아먹었다는 핑계로 이웃을 부려먹던 박씨의 사연을 들려주자, 철수는 그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아버지가 마치 박씨마냥 자신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다고 힐난했다. 또한 철수가 쓰고 있는 인어 부자(父子)의 이야기는 등장인물과 상황만 조금 손봤을 뿐, 사실상 철수와 아버지 사이를 쏙 빼닮았다.
이렇듯 <저수지의 인어>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대화들이 오간다. 쉴새없이 떠드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후자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가 된다. 철수의 아버지가 무력한 자신의 현실을 회피하고자 남의 이야기에 매달렸듯이, 영희가 외로움을 달래고자 온라인 채팅을 이용했듯이.
허나 그건 잠깐의 미봉책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에 매달리면 도리어 이야기에 잡아먹히고 만다. 특히 그것이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실제로 극 중에서 경태는 요즘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인터넷에서 누군가 달아둔 댓글을 보면 그게 내 생각이 되는 것 같다며 토로했다. 그렇게 조금씩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은 다르다. 물론 그들에게도 이야기는 도피처가 될 수 있다. 허나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저 써야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철수에겐 인어 부자(父子)의 이야기가 그랬다.
극중 인어 부자(父子)는 오염된 바다를 피해 뭍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의 새로운 터전은 저수지다. 왜 하필 저수지일까. 저수지는 바다로 가지도 못하고, 아직 쓰임을 찾지 못한 물들이 고인 장소다. 현실에 매여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저수지와 철수 부자, 인어 부자는 서로 닮았다. 그래서 철수는 저수지 아르바이트를 싫어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소개해 준 수박 농장 일자리를 수락하는 것도 싫었다. 장소만 바뀔 뿐, 아버지에 매여 자신의 청춘을 낭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면 철수는 그토록 하기 싫어했던 수박농장 일자리를 수락한다. 그의 상황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철수는 여전히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아버지는 아직 못 미덥다. 다만 그의 마음이 달라졌다. 그렇기에, 더 이상 고여있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 본성을 좇아 바다로 떠났던 아들 인어가 그랬듯 철수 역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저수지를 떠났다.
이때 중요한 건 철수가 이 이야기를 영희 덕분에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른 사람 덕분에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니. 방금까지도 남의 이야기에 매달리면 안 된다고 했으면서. 허나 그게 사실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으니까. 좋든, 싫든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상관없이. 철수가 영희 덕분에 인어 부자(父子)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면, 영희도 철수의 재촉 덕분에 아무에게도 내비치지 않았던 자신의 진심을 독백의 형식으로 고백할 수 있었다. 극의 말미에 영희가 내렸던 선택에도 철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애초에 영희라는 이름도 그녀의 본명이 아니었다. 주인공의 이름이 ‘철수’라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영희’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철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철수가 쓴 인어 부자(父子) 이야기를 보게 된 아버지는 그제야 아들의 진심을 이해했다. 이후 아버지는 출근하는 철수에게 일이 끝나면 데리러 갈 테니 연락을 달라고 했다. 아버지 또한 철수의 이야기로 말미암아 잊고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 결말에 다다르기 위해 오늘 하루도 애쓰는 각자의 삶은 그 자체로 찬란하다. 그렇게 자기만의 빛으로 발하는 개인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가끔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응원을 건네며 함께 결말로 나아간다. ‘건필.’ 대화를 마칠 때면 철수와 영희는 서로에게 늘 이 말을 건넸다. 지금 이순간에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이만한 응원이 또 있을까.
[“어떤 이야기는 이미 완성되어 선택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 앞에서 우리는 매번 지치고 무너진다. 세상은 우리의 삶을 제물로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 때, 무엇을 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 그때 세상은 우리를 건져내어 양지로 올려준다.”] - 웹툰 <마침표의 유예기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