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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가족 모두가 백수인 기택네. 그러던 어느 날, 장남인 ‘기우’는 친구의 소개를 받아 박 사장네 집으로 과외 면접을 보러 간다. 이후 자신의 가족을 이곳에 취업 시키기로 마음먹은 기우는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신분을 숨긴 채 가족 모두를 박 사장네에 취업시키는 데 성공한다. 한편 박 사장네는 막내 다송의 생일을 맞아 캠핑을 떠나고, 기택네는 텅 빈 박 사장의 집에서 계획의 성공을 자축하며 술판을 벌인다.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이 기택네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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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은 상층과 하층의 구분이 명확하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각자의 위치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더 높이 올라가기를 갈구하는 인물이 2명 있다. 바로 ‘기우’와 ‘기정’이다.

 

기우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다혜와 결혼하여 그들이 사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었다. 필요하다면 대역 가족을 세우고서라도 말이다. 기정 역시 냄새 때문에 고민에 빠진 가족들 앞에서 반지하를 벗어나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며 위로 올라가려는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기우와 기정의 욕망은 극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 기우가 박사장네의 문을 열었다면, 기정은 치밀한 계획을 통해 가족들을 박사장네에 들였다. 다시 말해 <기생충>은 서로 다른 계급에서 사는 두 가족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했던 기우와 기정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기정과 기우가 가진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자신들의 부모와 달리 가명을 쓴다는 것이다. 기우는 ‘케빈’으로, 기정은 ‘제시카’로 자신을 소개했다. 마치 배우처럼 본래의 자아를 구석으로 밀어 넣고, 새로운 인격을 몸 안에 채웠다. 그 새로운 인격은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배역에 기정과 기우는 종종 지나치게 몰입했다. 일례로 기정은 과일을 가져다주는 종숙에게 ‘아줌마, 그거 앞으로 문 앞에 놓고만 가요’라고 굳이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배역 속에 자신을 감춰도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진짜 모습을 막을 순 없다. 이를테면 냄새 같은 것들이 그렇다. 기정과 기우는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아예 기우는 빨래할 때 섬유 유연제를 다르게 쓰면 되지 않겠냐며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내놓기까지 했다. 만약 진짜 모습이 통제를 벗어나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면 둘은 곧장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반응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향한 적개심으로 표출되었다. 집 앞에 노상방뇨를 하는 취객에게 물을 뿌리거나,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윤기사를 향해 정색한다거나, 기택이 잘린 윤기사를 걱정하자 자신들에게 신경 쓰라며 일갈한다거나.

 

허나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상황이 본질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연기를 한들 ‘케빈’과 ‘제시카’는 가상의 인물이다. 박사장네 집을 떠나 다시 반지하 집으로 돌아오면 비참하고 차가운 현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 속에서 그렇게 기우와 기정은 조금씩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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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기정과 기우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시작은 문광을 따라 근세가 숨어있는 지하실로 내려가면서부터였다. 기정과 기우는 그곳에서 자신들이 그토록 외면하고자 했던 현실을 비로소 마주했다. 구약성서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불타는 동안 이를 피해 도망치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신의 금기를 깨고 돌아본 순간 소금 기둥이 되었다. 기정과 기우가 바로 그 꼴이었다. 문광과 근세에 의해 자신들의 감춰두었던 본모습을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그날 이후, 기우와 기정의 길은 서로 갈렸다. 기정은 종숙에게 문광네와의 대화를 통해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반면 기우의 길은 그쪽이 아니었다. 기우는 다혜에게 마당에 모인 손님들과 자신이 어울리냐고 물었다. 다혜가 그렇다고 하자 기우는 그 대답을 실현하기 위해 수석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 근세를 죽이려 들었다.

 

한바탕의 소동이 지나가고,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렸다. 기정은 죽었고, 기우는 살았다.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지하실을 거부하고 끝까지 대립하기를 택했던 기우는 어찌 되었든 간에 살아남았지만, 지하실을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기정은 끝내 그것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그런 세상에서 희망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 어쩌면 지옥은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끌어안지 못할 때 강림하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우는 돈을 벌겠다고 다짐했다. 문광과 근세가 떠난 후, 지하실의 자리는 이젠 기택이 차지했다. 돈을 벌어 아버지를 지하실에서 끌어올리겠다는 기우의 다짐은 근세를 죽이려 들었던 그날의 행동과 본질적으로 같다(그는 끝끝내 자신의 지하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방식이 양식화되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기우는 아직 소동이 벌어지던 그날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지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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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나날이다. 농담처럼 주변인들에게 새해가 온 게 아니라 13월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종종 했었는데 설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기미는 잦아들지 않는다. <혐오의 시대>를 쓸 때만 해도 어렴풋하게 느꼈던 전조들이 기어코 실현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건 비단 우연은 아닐 것이다.

 

웹툰 <닥터 프로스트>를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인간이란 자신 안의 그림자를 직시하며 양지를 향해 떠나는 여행자와 같다. 그 여행의 끝에서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태양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림자’는 기우와 기정이 품었던 ‘지하실’과 동일하다. 바꿔 말하자면 내 안의 그림자를 직시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그림자도 용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 모인 세상을 우린 지금 살고 있다.

 

좋든, 싫든 간에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이 세상에 필요한 건 기우의 희망이 아니라 기정의 희망이다. 기정의 희망은 작은 악의에도 잡아먹힐 만큼 연약하지만, 혐오와 폭력이 아닌 제3의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이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희망의 본질이다.

 

다가오는 2월이 14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해답을 타인에게서 요구할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먼저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내 안의 그림자와 지하실을 직시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타인의 그림자와 지하실을 용인할 수 있는 여유를 되찾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태양이 될 수 있기를, 하다못해 저 작은 별빛이라도 될 수 있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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