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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이번 설 연휴에는 영화를 정주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재미있게 보았던 판타지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더 캣’을 시청했다.

 

분명 아이였던 시절엔 별생각 없이 유쾌하게 느껴졌던 두 영화였다. 그런데 다시 시청하니 두 영화는 예상보다도 더 오묘하고 기괴했다. 아무래도 내가 '어린이 적 상상력'의 한계를 맞은 것 같았다.

 

두 영화를 시청하며 새롭게 느낀 부분들을 글로 담아보았다. 여기에 두 영화가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가족’에 대한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도 곱씹어볼 수 있었다.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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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개봉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세계 최고 초콜릿 공장이지만 베일에 싸인 '윌리 웡카 초콜릿 공장'에 초대된 다섯 아이와 웡카의 이야기이다. 5개의 웡카 초콜릿에 들어있는 '황금 티켓'을 다섯 명의 아이가 보호자와 함께 웡카의 공장에 초대된다. 그러나 식탐이 많은 아우구스투스는 초콜릿 강에, 철없는 떼쟁이 버루카는 소각장에 빠진다. 뭐든지 일등이 되고 싶은 바이올렛은 파란 블루베리처럼 둥그렇게 부풀고, 게임 중독인 마이크는 TV 속 세상에 갇힌다. 그 어떤 것보다도 가족의 가치를 우선하는 찰리는 결국 웡카의 후계자가 되고, 웡카와 찰리 가족은 공장에서 행복하게 사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분량도 많고 다룰 수 있는 주제도 워낙 많은 영화였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연출이었다. 어렸을 때도, 지금도 이 영화는 볼 때마다 특유의 독특하고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팀 버튼 감독만의 유머와 비현실적인 장면들은 이 영화의 연출적 매력을 극대화한다.

 

동화적 연출을 그대로 구현한 이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은은히 깔린 어둠과 살짝은 기괴하게도 느껴지는 연출은 어른이 된 나에게 약간의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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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시선으로 다시 보며 가장 이상하게 느껴진 건 바로 아이들의 변형이었다. 사실상 찰리를 제외한 모든 아이가 각자의 이유로 벌을 받는데, 어거스터스는 초콜릿 강물에 빠져 공장 파이프로 빨려 올라가고, 바이올렛은 껌을 씹다 보라색 블루베리처럼 부풀어 오른다. 버루카는 소각장으로, 마이크는 TV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들은 어른의 입장에서 약간 충격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출을 바탕으로 이 영화는 선과 악의 설정 및 대비가 극명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네 명의 아이들은 각자의 탐욕 때문에 몸이 변형되는 벌을 받는다. 가족적 가치를 우선하는 ‘찰리’만 유일하게 벌을 받지 않고, 결국 공장 후계자라는 큰 선물을 받게 된다. 탐욕은 악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가족이라는 점을 영화 전반에서 계속 이야기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아이들을 위한 교훈적인 영화라는 점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드러난다.

 

한편으로 어른이 된 입장에서 이 네 아이들의 부모 이야기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 느꼈다. 아이들의 탐욕적인 마음과 행동은 온전히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아이를 매번 대회에 내보내며 일종의 트로피처럼 생각하는 바이올렛의 엄마와, 자신의 아이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버루카의 아빠는 부모의 교육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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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어둡고 묘한 이야기 사이에서, 어린아이인 찰리와 어린 시절을 한참 지난 어른 웡카의 대비 및 융화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어린 시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땐 다섯 아이를 보며 나도 초콜릿 공장에 견학을 가보는 경험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윌리 웡카’라는 인물에 더 깊이 이입할 수 있었다.

 

특히 웡카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그건 웡카에게 오랜 결핍으로 남아있었다. 영화 중간중간 웡카는 찰리의 순수한 질문들을 듣고 잠시 자신이 어린아이였던 과거를 회상한다. 어린 찰리에게 있어 세상은 비교적 덜 복잡했다. 그래서인지 소중한 가치를 지키고 자신의 믿음을 올곧게 따르는 건 이미 어른으로 산 시간이 긴 웡카보다 비교적 쉬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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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측면에서 찰리의 질문들은 찰리에게 있어 그다지 복잡한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어른의 삶을 오래 살아온 웡카에게는 그 질문들이 꽤 심오한 동시에 아주 멀리 가 있는 과거의 기억을 찾도록 한다. 결국 찰리의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이 웡카와 그의 아버지가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어른이 된 지금, 웡카의 내적 갈등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아버지와 다시 좋은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도 한편으로 이제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게 아닐지 걱정하는 어른 웡카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런 어른들에게 찰리는 결국 본질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족이라는 본질적 가치. 그래서 ‘찰리’의 존재는 이 영화를 보는 어른들에게 그 본질적 가치를 상기시키는 매개체로 기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같은 코미디, 최악의 영화 '더 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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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꾸러기 오빠 ‘콘래드’와 모든 일정을 계획적으로 관리하는 여동생 ‘샐리’는 틈만 나면 서로 부딪히는 앙숙이다. 어느 날, 외출하는 엄마는 아이들에게 절대로 집안을 어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집안에서 외롭고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이들에게 ‘캣’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이들은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마법의 상자까지 열리는 바람에 집은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변하지만, 아이들은 캣과 함께 마법의 상자를 닫고 집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렇게 캣은 사라지고, 엄마는 깨끗한 집에서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처럼 ‘더 캣’ 역시 2000년대 초반 영화 특유의 풍부한 색채와 과장된 느낌의 연출을 보여준다. 특히 세트장에 강렬한 색감을 많이 사용했는데, 주인공들의 집과 엄마가 다니는 직장 대부분이 연두색 배경으로, 엄마의 선명한 분홍색 드레스와 색감 대비가 강렬하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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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동화적인 쪽에 가깝다면, ‘더 캣’은 좀 더 만화적인 동시에 기괴하고 황당한 스타일에 가깝다. 영화 초반 강렬한 색감의 세트장은 발랄한 분위기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내용은 기괴함 그 자체이다. 우선 캣의 외형이 상당히 충격적이다. 고양이 탈을 쓰고 고양이처럼 분장했지만, 하는 행동은 인간과 똑같아서 약간 무섭기도 하다.

 

게다가 아이들과 캣은 잠든 베이비시터 위에 올라타 마치 놀이기구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아이들을 엄마로부터 떼어내려고 하는 이상한 아저씨를 강에 빠트려 골탕 먹이기도 한다. 고양이 인간인  캣 역시 비주얼도, 몸짓도, 그가 하는 농담조차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원작은 닥터 수스의 일반적인 아동 도서로, 영화 개봉 당시에는 혹평받았다는 게 이해가 갔다. 심지어 2004년에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영화라고 하기 미안한 영화’에 선정되며 당대 최악의 영화로 꼽히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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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어린 나에게 이 영화는 너무도 재미있었다. 원작 내용을 모르는 상태로 영화를 봐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내게 이 영화는 아이의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하는 코미디 영화였다. 특히 아이들의 지루한 규율을 깨고 멋대로 행동하는 캣의 존재는 아이라면 한 번쯤 꿈꿀법한 존재였다. 엄마가 아끼는 소파 위에 올라 방방 뛰거나, 온 집안에 얼룩을 뿌린다거나, 괴상한 자동차를 엉망진창으로 운전하는 캣은 존재만으로도 재미있고 유쾌하다.

 

게다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어른들의 시선에서 선악의 구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면, ‘더 캣’은 아이들이 한 번쯤 보내고 싶은 일상의 경험 속에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오빠 콘래드와 동생 샐리는 영화 초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콘래드는 항상 엄마의 규율을 어기는 사고뭉치이고, 샐리는 그런 오빠를 한심하게 여기면서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척하는 동생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캣이라는 존재를 통해 각자 내면의 성장을 이룬다.

 

콘래드는 자기보다 장난기가 더 많은 캣과 띵원, 띵투 때문에 이상하게 변한 집을 다시 복구할 필요성을 느끼고 행동한다. 메모장에 적은 할 일 목록을 빠짐없이 체크하고 장난꾸러기 오빠를 한심하게 생각하던 동생 샐리는 캣을 통해 아이답게 노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면서 두 남매는 서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평소 이야기하지 못했던 진심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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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면 이상한 고양이와 두 아이들의 우당탕 일상 망치기 정도로 보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캣이라는 존재를 통해 아이들이 겪은 변화와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콘래드를 사관학교에 보내려던 아저씨가 끈적이는 보라색 액체를 뒤집어쓰고, 아이들의 엄마에게 이들의 행태를 고발하지만, 엄마는 결국 아이들을 믿으며 아저씨를 집 밖으로 밀쳐낸다. 아무리 말썽을 피우고 서로 으르렁거려도 결국 가족은 서로를 의지하고 믿는 존재임이 영화 말미에 드러난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확실히 이상한 영화였고, 최악의 영화로 꼽힐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땐 고양이 인간이 등장하는 단순한 코미디 영화로 느껴졌는데, 어른의 시선에서 이 영화는 모든 장면과 내용이 과장되고 이상했다. 그럼에도 잊었던 동심을 다시 찾을 수 있었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몽환적 연출, 아이와 어른의 시각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더 캣’은 그 결을 다르지만 분명 독특한 연출을 보여준다. 모두 과장되고 비현실적 연출로 시각적인 독특함을 만들어낸다. 특히 어린이의 상상 속 세계를 구현한 듯한 세트 디자인과 색채는 두 영화의 공통된 특징이다.

 

두 작품이 가진 이러한 특징은 어쩌면 아이들의 시선을 최대한 담고자 노력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초콜릿 강이나 부풀어 오르는 아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몸 같은 장치들은 어른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기도 하고, 결국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을 설명하는 장치로써 활용될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는 가능하다.

 

‘더 캣’ 역시 베이비시터를 가방처럼 들고 다니거나, 가구가 살아 움직이는 세트장 연출도 어른들에게는 황당하고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일상에서 충분히 상상 가능한 세계인 것이다.

 

또한 그런 독특한 연출 속에서 두 작품 모두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다른 가치로 대체될 수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을, ‘더 캣’은 경험을 통해 강해지는 가족의 유대를 이야기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존재,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가족’이라는 존재와 그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어른들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크기변환]더 캣 마지막 장면.jpg

 

 

이제는 ‘찰리’보다 어른인 ‘웡카’에, ‘콘래드’와 ‘샐리’보다 그들의 엄마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더 본질적 가치로부터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상상과 공상의 세계에서 헤엄치던 어린아이와, 변하는 나이에 맞게 새로운 도전 과제들을 계속해서 깨나가는 어른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내면의 어린아이는 존재하고, 때로는 그 존재 덕분에 인생의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

 

*

 

설 연휴를 맞아 추억의 판타지 영화를 다시 관람하며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어린아이를 잠깐이라도 마주할 수 있었다. 판타지는 늘 신비롭고 몽환적이지만, 그 끝에 현실의 보편적 가치들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다.

 

또 아이의 시선에서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어른이지만, 나에게 있어 가족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존재임은 틀림없다. 덕분에 연휴를 맞아 가족들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평안한 연휴를 보내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효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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