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피아노로 그린 자화상 - 쇼팽, 블루노트

글 입력 2025.01.0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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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쇼팽, 블루노트>는 소극장 산울림에서 2013년 이후 정기적으로 여러 음악가들의 삶과 음악을 다루어왔던 '산울림 편지콘서트' 시리즈의 하나이다. 이는 클래식 라이브 연주와 드라마를 결합시켜 한 음악가의 연주곡 뿐 아니라 그의 삶과 결부된 시대적 배경까지도 적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곡에 대해 이해와 몰입을 돕고 전체적인 생동감을 전달한다.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호를 통해 당시 그의 음악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쇼팽은 그 명성대로 자신의 삶을 피아노에 바치며 19세기 중반 유럽에 '피아노의 시대'를 열어젖힌 인물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그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를 등장시킴으로써 쇼팽과 상드의 10여 년 동안의 연인 관계를 바탕으로 쇼팽이 어떠한 신체적, 정신적 환경에서 그와 같은 작곡들을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조명한다. 또한 그가 음악을 통해 올린 수익 대부분이 폴란드의 독립 운동에 사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시작부터 끝까지 공연의 플롯을 관류하는 '폴란드', 바로 쇼팽의 조국과 그에 대한 쇼팽의 고뇌와 성찰 등도 눈여겨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쇼팽, 블루노트>에서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곡들이 다수 연주되면서 관객들이 쇼팽의 음악을 친숙하게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공연이 진행되는데 특히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는 'Nocturne, Op.9 No.2'는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로도 매우 유명하다. 그 외에도 쇼팽 특유의 곡이 지닌 구조적 짜임새, 피아노의 다양한 음색을 구현하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기교, 당시로서는 전통적인 흐름에서 벗어났던 고유의 테크닉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여러 곡들을 통해 쇼팽의 음악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 없는 공연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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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쇼팽을 좋아하고 그를 칭송하는 점은 이러한 슬픔을 통해, 또 그 슬픔을 넘어서 그가 기쁨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쇼팽에게서는 기쁨이 지배적이다. 슈만의 어느 정도 간략하고 범속한 기쁨과는 전혀 다른 그런 기쁨, 모차르트의 지복과 상통하지만 좀 더 인간적이며 자연에 동참하는 기쁨, 그리고 베토벤 <전원교향곡>에 나오는 시냇가 정경의 형언할 길 없는 미소가 그렇듯, 풍경과 하나로 녹아드는 지극한 행복, 드뷔시와 몇몇 러시아 작곡가들이 등장하기 전에 음악이 이토록 빛의 장난이며 졸졸대는 물의 소곤거림이며 바람소리며 나뭇잎과 새소리들이 스며들어 있는 경우는 쇼팽 이외엔 없는 것 같다.


- <쇼팽 노트>, 앙드레 지드, p22-23.

 

 

쇼팽에 대한 앙드레 지드의 헌사를 담고 있는 그의 저서 <쇼팽 노트>는 이번 공연 <쇼팽, 블루노트>와 여러 측면에서 맞닿아있다. 사실 공연 속 쇼팽에 대한 전반적인 감정과 정서는 슬픔이 지배적이다. 평생 지병으로 괴로워했던 쇼팽의 생애, 러시아에 대한 자신의 조국의 혁명이 실패로 끝난 것에 대한 참혹함, 조국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바르샤바에서 만났던 마리아 보진스카와의 파혼, 파국으로 치닫게 된 조르주 상드와의 연인 관계 등 실제 그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기쁨보다는 슬픔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쇼팽을 좋아하고 칭송하는 사람들과 그의 음악과 함께 유럽의 새로운 피아노의 시대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서 슬픔만을 발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인생 속의 대단히 불행한 몇몇 순간들을 부각시켰기에 그것이 그의 음악과 대조를 이루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관객은 그의 음악 속에서 부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지드는 <쇼팽 노트>에서 쇼팽의 음악에 담긴 인간적 감정에 대해 역설하는데 과연 그러한 감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영혼은 음악에 저항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영혼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는다. (...) 왜 인간의 현재는 은연 중에 언어의 자리를 남겨 두는가? 인간은 문장들을 곧장 귀로 듣는다. 일련의 소리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즉시 멜로디의 형태를 띤다. 인간은 순간적이기보다 동시대적인 것에 가깝다. 그런 식으로 언어는 내면에 자리하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인간을 음악의 노예로 만든다.

 

 

일전에도 아트인사이트에서 한번 다루었던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에 나타난 그의 음악관을 통해 왜 감정이 쇼팽에게도, 관객에게도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영혼은 음악에 저항할 수 없다는 말은, 이미 인간의 영혼이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다른 모든 예술 장르를 통해서나 특정한 행위들을 통해서 영혼을 발견하고 그것에 다가가는 길을 모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음악은 마치 한 영혼에 앞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져 음악을 듣는 행위 자체를 일종의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만든다. 또는 그렇다는 사실을 인간에게 확인시켜준다. 쇼팽에게 있어서 음악은 영혼의 고통과 동일시되었을 수도 있고 고통을 해소하거나 다른 무엇으로 승화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기능했을 수도 있다. 지드는 그의 음악에서 기쁨을 발견했다고 했는데 과연 쇼팽을 자신의 음악에서 기쁨을 감지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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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쇼팽과 상드가 요양차 스페인의 마요르카로 거처를 옮겼을 때 쇼팽은 파리에서 마요르카까지 피아노를 가져와 작곡을 이어갔다. 쇼팽의 건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까지도 그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과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에게 기쁨이었을까?

 

공연을 관람하며 내내 궁금했던 점은 쇼팽이 자신의 악화된 건강과 정서적 불안함을 피아노에 이입한 것인지, 상드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피아노를 통해 표현한 것인지였다. 다시 말해 그의 인생에서 언제나, 심지어 죽음에 너무나도 가까워져 있던 그 순간들조차도 피아노가 변함없이 긍정적인 요소, 조르주 상드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행복의 한 조각으로서 기능한 것인지가 궁금했다. 가장 사랑했던 무언가도 언젠가는 멀어지기 마련이다. 조르주 상드가 끝내 쇼팽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피아노만은 달랐던 것 같다.

 

그것은 피아노가 그를 순간적이기보다 동시대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은 순간적이었을지언정 피아노는 동시대적이었다. 그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쇼팽'보다 '피아노의 시인'이자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으로 영원히 살아 숨쉬게 한 것은 피아노인 것이다. 이때 내가 생각하는 '동시대성'은 다음과 같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위의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은 파스칼 키냐르가 말한 인간의 동시대성과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그리고 적어도 쇼팽에게 있어서 동시대성이란, 언어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는 방식이 아닌, 피아노와 음악이 그의 내면에 자리하여 어찌할 수 없는 고통과 더불어 그의 음악 속에서 생동하는 기쁨까지도 표현할 수 있었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상드와의 사랑은 과거 속으로 밀려나고 말았으나 그는 피아노와 함께 사후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쇼팽과 상드가 마요르카 섬에서 함께 지내던 어느 날, 폭우로 인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조르주 상드가 죽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홀로 눈물을 흘리며 연주했던 '빗방울 전주곡', 피아니스트 피오트르 쿠프카의 연주로 공연장이 가득 채워졌던 'Prelude in D flat Major, Op.28, No.15'를 들으며 떠올렸던 그날의 빗방울들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쇼팽에게 밀쳐짐과 나아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빗방울 전주곡을 들으며 쇼팽이 보았던 빗방울을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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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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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튜핏
    • 지드의 필력은 정말 대단하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지드만큼이나 재밌는 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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