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렇게 한 번 행복하면 됐죠.
그럼 된 거예요.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
- 제인
장마가 지난 여름밤의 서늘한 공기가 무기력하게 엎드려 있는 나의 양팔을 감싸 안았다. 하루 종일 한 것도 없이 다른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을 관망하는 삶을 보내니 초라한 내 모습이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또 다른 시차 속의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비겁해진다.
이런 나에게도 차별 없이 온몸 곳곳에 밤공기가 닿는 것이 느껴진다. 오늘처럼 무엇인가에 위로받고 싶은 날이면 '제인'이 떠오른다. 타인만큼은 괜찮아 보이기 위한 거짓말로 나를 포장하려 할 때 그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다.
#1 소현의 꿈 속에서
영화 '꿈의 제인'은 묘한 분위기의 노래와 몽환적인 불빛과 함께 지수가 죽은 후 아이들의 대화로 시작된다. 지수를 산에 묻은 뒤 소현은 정호와 있던 모텔방으로 가 편지를 쓰고 손목을 긋는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리며 소현의 환상이 시작된다.
트랜스젠더인 제인은 가출 청소년들을 데리고 살며 엄마처럼 따뜻하게 돌본다. 평화로운 삶을 보내던 중 정호를 사랑한 제인은 소현의 거짓말을 듣고 극심한 우울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불행한 얼굴로라도 살아가자는 제인의 말이 무색하게 소현의 꿈은 제인의 죽음으로 완결된다. 이 꿈은 소현의 현실과 제인과의 첫 만남이 오버랩되어 만들어진다.
#2 소현의 현실
현실 속 소현은 엄마의 죽음을 목도하고 집을 나와 자신을 받아준 유일한 사람인 정호와 모텔방을 전전하며 산다. 하지만 그마저 소현을 떠나버리자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길 기다리지만 변함없이 외로웠고 쓸쓸했으며 어린 그에게 잔인했다. 결국 소현은 가출팸에 들어오게 된다. 그 속에서 갖은 폭력과 극심한 외로움으로 점철된 소현의 삶은 지옥과 다름없다.
그러던 중 지수라는 인물이 가출에 들어오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소현을 따뜻하게 대하는 지수를 보고 제인에게 받았던 따스함을 느낀다. 하지만 지수를 아니꼽게 보던 가출 사람으로 인해 지수는 죽게 되었고 이는 다시 첫 장면과 이어진다.
자해를 한 첫 장면과 달리 실제 소현은 모텔에서 나와 제인을 찾기 위해 뉴월드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마저 잃어버린 채 사무치는 외로움에서 나오기 위해 소현은 지수의 핸드폰으로 대포에게 전화를 하고 지수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려준다. 그곳에서 소현은 지수의 동생을 만났고 끝없는 죄책감과 또다시 혼자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소현과 제인이 처음 만난 장면이 나온다. 뉴월드에서 소현은 제인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불행 속에서 자그마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자는 그의 말을 듣고 제인을 동경하게 된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전 어찌할 줄 몰랐어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 곁에 머물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죠.
- 제인
이 영화는 극심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아무도 그에게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 결국 철저히 고립된 청소년의 성장통을 다룬 이야기이다. 이 아이에겐 그 어떠한 동정심도 와닿지 않는 공감하는 말도 필요 없다.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법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 주는 깨달음 말이다.
아이들은 모든 방면에서 서투르고 실수하며 때때로 무너지는 유약하고 미결된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성장할 수 있다. 시시한 삶 속에 또 다른 제인이 스며든다면. 소현은 단지 살아가려고, 사람들에게 버려지지 않고 섞이기 위해 항상 차악의 노력을 해왔다.
그런 소현에게 제인은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쩌다 한 번씩 행복해하며 살아나가라고 말한다. 비바람에 맞아도 숨지 않고 겨우내 꽃을 피운 단단한 어른의 말은 소현을 살게 만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소현의 눈을 빛나게 했다.
이제 소현은 제인과의 소중했던 추억은 묻어두고 다시 혼자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불행하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행복을 맞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