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베른하르트 슐링크와 사랑 - 나의 망명지에서(6) [여행]

19세기의 연인처럼 서투르게 사랑하자, 우리
글 입력 2025.01.1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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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l People (2020).jpg

 

 

단단히 동여맨 풍선의 입구 앞에서 가속도가 붙은 엔트로피 마냥 혀 끝에 붙은 말들이 유달리 안 떨어지는 날이 있다. 그런 일이 간혹 일어나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사실상 내키는 날에나 하는 걱정이기 때문에 어쩌면 사람들이 들어오면 필히 작동해야 하는 놀이기구와 쓰임이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만연한 걱정이 흐르는 육체는 종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는 암세포 덩어리들로 들끓고 있다. 미사여구의 처리 과정을 거친다면 조금 더 논리정연하고 현학적인 포장이 가능하겠지만 이미 떠난 버스에게 손을 흔들어봤자 큰 흥미가 일진 않을 것이다. 인간은 시차를 못 이기는 존재이다. 타인을 향한 질보단 양으로 가득 찬 단어들을 분침 없이 던짐으로써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 날은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타서 일렁이는 바람을 민낯에 그대로 맞아서일까 내리쬐는 직사광선과 죽은 새를 보아서일까 평소보다는 한껏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일까 본성이 이끌지 않는 곳으로 방황하고 싶었다. 산뜻한 과일들이 먹고 싶어 이틀 간의 고심 끝에 브런치를 파는 작고 알록달록한 한 레스토랑을 찾아 갔다. 고즈넉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이 작은 가게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분명히 눈에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치앙마이로 여행을 와서 우연한 인연들을 기대했지만 어제 사원 앞에서 I를 만난 것에 큰 기쁨을 얻어 우연이 반복되긴 어렵다고 심연 속에서 내게 경고하는 듯했다. ‘자연’스럽게와 ‘충동’적으로가 이번 여행의 테마였기 때문에 기대와 우연은 차지하는 부피가 적었다.


가게는 낮은 층고에 가로로 길쭉한 노포 형태에 바랜 초록빛들로 칠해져 있었고 곳곳에 자리 잡은 식물들은 가게 주변의 짙은 녹빛의 나무들과 함께 푸르렀다. 바람은 일랑이며 천막 중간중간에 걸려 있는 녹슨 종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이곳에 도착한지 이틀 된 여행객답게 살짝은 수줍게 ‘싸와디-캅’하며 인사했고 그들은 여전히 먼저 내게 ‘Hello’라고 인사했다가 서툴게 자신들의 언어를 발음하는 아이를 대하듯 같은 말로 화답했다.

 

오래된 벽과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바깥 풍경을 보기 위해 밖을 향해 자리를 잡고 요거트 과일 토스트와 토마토 파인애플 주스를 주문했다. 약간의 흥분과 나른함이 공존하는 애매한 감정들에 정신 못 차리며 사랑스러울 점심을 기다렸다. 또 시작된 사념과의 전쟁 속에서 패배를 맛보다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한 외국인 남자가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서양인 특유의 여유로움이 한껏 몸에 베어 있었고 단출한 가방에 편안한 반소매, 반바지 차림이었다. 고동빛이 섞인 짙은 금발머리는 살짝 그을려진 피부와 잘 어울렸다.

 

아직도 사람들을 대할 때 끝없는 상상을 부풀리고 걱정하며 결국에는 후회로 점철된 골 아픈 흔적만이 남아 있다. 사념과 미련은 떼어낼 수 없는 나의 족쇄 같은 것이었는데 ‘아직도’가 아닌 ‘여전히’가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된다. 나를 이루는 이러한 구성요소로부터 가끔씩은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마도 오늘인가. 처음을 장식하는 모든 것들은 끔찍하게 사랑하고 멈출 수 없는 해방을 느낀다. 테이블을 하나 두고 두 외국인이 모두 앞을 향해 앉아 있는 모양새는 퍽 삐그덕거렸다.

 

나는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합석을 요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치앙마이에 온 지 이틀째이니 아직 멋도 모르는 여행자의 기분을 즐기고자 하는 되바라진 다짐이었다. 옴짝거리던 입술을 하나의 결심과 함께 떼어내고 그에게 물었다. 애매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종국에는 나의 짧은 영어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Sure!’이라고 답했다. 단순한 말 한 마디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그렇게 브런치 카페의 볕 잘 들어오는 한 테이블에서는 식 중 취재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처음 물었다. 이상한 물음이었다. 처음 보는 사이에 한 사람의 정체성을 타인이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기호는 이름이 아니었던가. 배낭여행자에게 더 확실한 정체성은 내가 살아온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추후의 일이었지만, 여전히 나는 이름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카인의 후예이든 뭐든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궁금하죠. 이름이 먼저 아닐까요?’

 

나는 대답하며 이름을 말했다. 전반적인 외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국적을 얘기해야겠다. 그는 캐나다의 한 섬에서 살고 있으며 나보다 두 살 어렸다. 그는 지치지 않고 명상에 대해 설명했고 나 또한 지지 않고 얘기를 듣고 질문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두터운 겨울의 추위로 인해 대학교를 빠져나온 듯했다. 이곳에 와 사원에서 명상을 하며 지냈지만 혹독한 명상의 결과 어깨를 다쳐 재활 치료를 받으며 현재는 여행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한창 유행하던 성격유형검사에 대해 토론하며 수많은 사념에 사로잡히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에 대해 얘기했다. 미래지향적이라는 꽤나 단정한 표현에서 벗어나 그의 ADHD 의 증세 중 하나인 수많은 상념은 명상을 통해 무뎌진 듯했다. 그와 얘기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니 완치 상태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그의 명상은 무념에 이르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생각을 한 올씩 푸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내가 시킨 주스는 미지근해졌고 한 층 더 밍밍한 맛이 났다. 토스트 또한 그저 그런 맛이었지만 그 가게에 대한 기억이 좋게 남은 이유는 ‘그’ 때문인 것이다. 가게에서 빠져 나와 여행자의 신분이 되어버린 그는 정처 없이 걷는다고 했다. 나는 걸어서 45 분이 넘게 걸리는 목적지를 가기 위해 자전거를 빌리려는 계획을 다 세웠지만 같이 있으면 쉬지 않고 떠들게 되는 그와 지금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걷겠다고 했다. 그가 가는 방향으로 걷자고 했다.


살인적인 직사광선과 아킬레스건을 전혀 지탱해주지 못하는 슬리퍼를 신고 타는 듯한 목마름을 견디는 순간들은 나의 결심을 이따금 탓하게 했지만 즐거웠다. 입장료가 없는 사원에 들어가 뜻하지 않게 바지까지 서로 챙겨 입고 절하는 방식을 그에게 배우기도, 108 배는 무슨 의미를 담은 건지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했다. 치앙마이 경찰서를 지나며 그는 브라질리언 무에타이를 배운 얘기를 나는 검도와 복싱을 배운 얘기를 했다. 그는 쿠바의 가난에 대해 안타까움과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꼈고 나는 뉴올리언스의 재즈와 다정함을 전달하고자 애썼다. 그는 가족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었는데 두 명의 여동생을 존경하고 있다는 게 마음으로 느껴졌다.

 

목적지에 다다른 우리는 한 숨의 공백을 뒤로 한 채 지치지 않고 또 이야기했다. 내가 가진 신념과 생각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하루종일 타인과 이야기한 것은 정말 간만이었다. 거의 처음이었을 수도 있고. 하루 전부를 채울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함을 가진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찰나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그와 걷겠다고 선언했고 기회를 잡았다. 또 한 번의 우연은 손수 만들지 않으면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기적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염원하며 그를 필름에 담고 시시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지나왔던 방향으로 틀어 걸어갔다.

 

모국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엮여나가는 것인가. 덜컹거리는 슬리핑 버스 1층에 무심한 표정으로 누워 밝은 밖을 공허하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에 대한 답을 따라 나서니 여행 첫 날 만난 I가 해준 말들이 떠올랐다.


 

[이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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