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잊을 수밖에 없는 사랑일지라도, '나의 해리에게'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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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밖에 없는 사랑일지라도, <나의 해리에게>
얼마 전,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단지에서 뛰어내려 뇌사 판정을 받은 그 아이는 병실 밖에 서 있는 저에게 사흘간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나름 친한 친구라고 자부했는데 그 오만함을 잘못 먹어 탈이 났는지, 화마에 휩싸인 듯 속은 들끓었습니다.
떡볶이에 콜라를 먹던 때부터 닭발에 소주를 먹는 현재까지 이어진 유구한 역사가, 그 친구에게는 박하사탕처럼 화한 기운만 남기고 사라졌다니 새삼 억울했습니다. 이를 진작 알았다면 그 조그만 입안에 수도 없이 박하사탕을 채워 넣어 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그 친구를 또다시 외롭게 만들 겁니다. 한눈을 판 찰나에 그 친구는 또 자유롭게 날아가겠죠.
그런데도 되돌아간다면 최선을 다해 사랑을 퍼담아 줄 것입니다. 그 순간 친구가 외롭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평생 같이 숨 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과 절망을 담아서요.
그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도 사랑을 주고받았던 흔적은 모세혈관 어딘가에 흐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미련한 믿음 때문에, 잊을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도 다시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는 저와 마찬가지로 잊을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주창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PPS 방송국에는 아나운서국의 골칫거리인 서른일곱의 아나운서 주은호(신혜선)와 간판 아나운서인 정현오(이진욱)가 있습니다. 둘은 4년 전, 8년 동안 사귀었지만, 결혼을 원했던 은호와 결혼을 할 수 없었던 현오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의견 차이로 헤어지고 맙니다.
한편, 과거 은호의 하나뿐인 여동생 주혜리는 실종되었고, 은호는 이에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데요. 현오와의 이별은 은호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큰 절망감을 주었습니다. 연애도, 일도, 가족도 그녀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죠.
한편, 다른 방송국인 미디어앤서울의 주차장에는 은호와 똑같이 생긴, 그렇지만 행복한 스물여덟의 주혜리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주차장 관리 일을 하고, 오랫동안 좋아한 미디어앤서울 아나운서 강주연(강훈)과 사귀면서 하루하루가 꿈결 같았죠.
은호와 혜리는 기억이 사라지기도, 생겨나기도 하는 혼란스러운 상태를 맞이하며 정신 상담을 받게 됩니다. 사실 혜리는 은호가 잃어버렸던 동생 주혜리에 대한 슬픔과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던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자아였죠.
주연은 아나운서를 꿈꿨던 형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로 인해 상처를 받고 형의 꿈을 대신 이루고자 미디어앤서울에 입사하게 됩니다.
주연은 항상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어머니와 자신을 압박하는 죄책감 속에서 겨우 숨을 쉬면서 버텨갑니다. 그런 그에게 살아있음에 고마움을 느끼고, 오랜 시간 좋아하면서 행복했다는 혜리를 보면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틉니다.
현오는 어릴 적 집을 나간 어머니와 도박에 빠진 아버지 대신 빚을 갚기 위해 사채업자들과 같이 살게 됩니다. 어머니가 어디서든 자신을 볼 수 있게 뉴스에 나오는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평생에 걸친 부채감과 예정된 불행한 미래는 그를 숨 막히게 합니다.
이처럼 남몰래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현오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합니다. 은호를 제외하고 말이죠. 은호의 까칠함과 다정함은 현오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예정된 미래를 매일 후회할 만큼 은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연은 혜리로부터 살아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현오는 은호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는 법을 찾았습니다.
은호는 혜리로부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주연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법을 배우고, 현오로부터 사랑을 주는 법을 배웠죠. 그들은 서로를 구원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호는 은호의 인생을 살기 위해 혜리를 온전히 지워냈습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도, 일을 하기 전 계약서를 쓰지도 않았던 혜리가 머물렀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녀는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버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을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하는 이유는 외롭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잊을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함에도 우리는 어쩌면,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구한 환상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설령 모든 것이 착각일지라도 그 착각으로 또다시 한번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다시 한번 잊을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하려고 합니다.
[이혜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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