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상을 바라보는 작은 창 - 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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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알아가기 전, 그가 남긴 작품을 보러 갔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나 그가 관철한 철학에 대해 무지한 채로 우선 그의 그림을 느끼고 싶었다. 마침 'Correspondence: Lee Ufan and Mark Rothko'라고 불리는 이우환 화백과 마크 로스코의 2인전이 한남동에 위치한 페이스 갤러리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Mark Rothko, Untitled. 1969
접촉(Contact)이 담긴 서신(Correspondence)
비가 아주 많이 내렸던 늦여름, 나는 영문 모를 까닭으로 피어난 호기심과 함께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색색의 네모난 직사각형 틀 안에서, 빗소리를 배경으로 어떤 감정들이 재생(再生)되는 듯했다. 흑색은 곧 두려움, 초록은 공허함, 빨강은 나의 열정.
내가 그림을 보고 운 적이 언제였더라, 생각했다. 그가 사람을 울리는 작품을 많이 남긴 이로 유명해서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다양한 것들과 교감을 시도하지만, 보통 그 주체는 생물이다. 작품 뒤에 이어지는 작가에 대한 끈질긴 연구와 고찰도 그 때문이다. 그림은 이미지고, 이미지는 순간을 제공할 뿐이다. 그림이 얼마나 정적인 순간을 제공하는지 생각해 보라. 시각이라는 한 가지 감각에 의존한 채 영원히 기억 속에서 재생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신과 나는 그리 다르지 않다. 작품에 자신을 이입해 본 경험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렇지만 사람 때문에, 사랑 때문에, 관계 때문에 울고 웃어본 사람은 꽤나 많을 것이다. 아마 둘의 차이는 ‘소통’에 있으리라. 나의 반응에 대한 상대의 의견과 축적된 언어에 따른 반응을 얻어서, 좋든 싫든 다른 상대와 이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 우리가 왜 대부분의 그림에 몰입하지 못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 이러한 제3의 벽을 느껴, 대화를 나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간의 ‘소통’이라는 거대하고 공허한 개념에 매료되어 있음에도, 이에 질려버려서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아질 때도 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붕괴들은 언제나 나 혼자만의 것이다. 누구도 나의 괴로움을 대신할 수 없다. 나는 나의 기쁜, 즐거운 순간들보다 이 순간들을 소중히 생각하여 쉽사리 내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들에게 웃음을 주는 존재일지는 몰라도, 울음과 무너짐을 선사하는 사람이 내 곁에 많이 있었던가?
모두가 남을 봐도 나를 보게 되는 인간의 불완전함이 사랑스러우면서도, 그 속에 섞여 있는 이기심과 몰지각성이 느껴질 때면 그 같은 인간의 일차원성이 괴로워질 때가 있다. 그러므로 일련의 괴로움이 약점이 되고 한없이 정돈되어야 하는 이 관계들 틈에서 나는 어째서인지 외로움, 분노, 슬픔 그리고 아쉬움을 애써 내보이는 게 좋아졌다. 우리는 남에게서도 나를 본다. 결국 나의 감정은 나만이 알 수 있다. 누군가와 완벽하게 소통하려면,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투명하게 내비칠 수밖에 없다. 상대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이 보이고, 같고 다른 순간들을 골라내므로.
다시 마크 로스코의 색을 본다. 그는 무엇을 제시하는가. 그것을 알고 싶다면 당신이 먼저 당신의 기억과 경험을 캔버스 밖으로 꺼내놓아야 한다. 솔직하게 튀어오르는 감상의 핑퐁을 받아내려 노력해야 한다. 당신이 딱 하나, '마음을 열어 놓으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림에서 뛰어노는 그의 맥박은 곧 당신의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나를 훑은 전율이 애초에 나의 것이었으므로.
가장 직설적인 감정, ‘공허’
우리가 지구처럼 여러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면, 가장 표면에는 지적인 층위가 있고, 그 아래로 시각적 층위와 사회·정치적 층위 등 끝없이 이어지는 사회적 지능의 층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근저에는 감정적 층위가 자리하고 있으며, 마크 로스코는 그 감정적 층위를 넘어 본능적인 차원까지 파고드는 작품을 창조하고자 했다.
책에 따르면, 1946년 그가 완전한 추상화의 길로 접어든 후, 그의 그림은 모두 ‘무제’가 되었다. 이는 구체적인 제목을 통해 의미를 한정짓기보다,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이 스스로의 감정과 내면을 투영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한 그의 선택이었다. 로스코는 특정한 대상이나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제거하고, 관객이 작품 앞에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온전히 내면을 느끼는 경험을 제공하고, 지나가는 순간조차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게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제시하는 ‘공허함’ 덕분이다. 로스코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가능한 많은 요소를 덜어내고자 했으며, 그 결과 그의 작품은 첫인상에서 미약하고 미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작품이 외부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 없이, 물리적 영역의 방해를 제거한 상태에서 관람자를 내면으로 이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무한히 많은 가능성을 쌓아갈 수 있다. 로스코는 비워진 것의 본질을 꿰뚫으며, 끝과 시작의 경계를 넘나드는 내면 세계를 탐구했다. 그가 제시하는 공허는 제한 없는 감정과 관념의 세계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합일과 투사, 영원히 공명하는 것들
이 책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로스코와 마크 로스코 사이의 교감은 단순한 부자 관계를 넘어선 예술적, 정신적 유대감으로 보인다. 6살 때 아버지를 잃은 크리스토퍼는 이후 아버지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예술 세계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이해하며, 남은 평생을 마크 로스코의 색채와 공허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해 나가는 데 썼다.
비로소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크리스토퍼는 마크 로스코의 내면과 그의 예술적 탐구에 깊이 교감하는 일종의 '합일'을 경험했다. 하나의 유산을 이어받은 자의 책임감과, 아버지의 내면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고독과 자부심이 섞인 이 복합성은 그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깊은 투사가 아닐까.
그리고 크리스토퍼는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선사하고자 한다. 마크 로스코의 회화적 특징과 변천사, 그의 연대기가 아닌 자신이 느낀 합일의 지점을 책을 통해 공유하고자 한다. 무언가와 완벽히 소통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렇기 때문에 마크 로스코와도 소통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으로의 탐험을 유도하는 것이다.
때로 감동이란 것 자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어렵게 느껴진다. 완벽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이 반복될수록, 마치 우리의 내면과 외부 세계 사이에 얇지만 견고한 막이 드리워진 듯하다. 무언가와의 소통에서 느껴지는 미완성의 순간들로, 끝을 알 수 없는 대화 속에서 길을 잃는다.
감정은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 마치 끝없이 퍼져나가는 물결처럼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 공명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속에서 흔들리고 살아 숨 쉰다. 마크 로스코가 그린 강렬한 색채와 간결한 형태는 추상적이지만 익숙하다. 책은 내면에서 떠도는 다양한 감정을 잡아 캔버스에 그리고, 결국은 우리와 합일을 이루어 마음 속을 평생 공명하게 될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다면 그의 작품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아무리 그를 보려 해도, 그의 작품은 숨겨진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안에서 위로와 공감을 찾을 수 있게 깊은 내면의 창을 두드리곤 하니까. 그런 때가 다가오면, 공명하고 흔들리는 감동의 상태를 지속할 수 있다. 원하는 한 영원히.
[김하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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