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을 몇 단어로 축약할 수 있을까?
요양병원 노인들의 부고를 쓰기 위해 세 단어로 자신의 삶을 정리해달라고 요청한 요양사는 내일모레에 백세가 되는 묵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묵할머니는 여덟 단어로 자신을 소개하겠다고 말한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 눈 앞의 노인의 허풍인 것일까.
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챕터별로 각각 다른 화자에 의해 진행되며 19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간대를 자유롭게 오가며 퍼즐 조각처럼 쓰여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또 어떤 진실인지 궁금증을 소설의 후반부까지 이끌어가는 힘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여성 주인공의 인생을 다루고 있다.
한국의 근대는 압축적이다. 종교전쟁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근대적 사건이 발생했다. 식민지 경험, 신탁통치, 내전, 독재, 경제 성장 등 굵직한 사건이 계속해서 닥쳐온다. 이 시기를 사는 주인공은 이리저리 계속 거대한 파도에 휘말리기 쉽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힘든 시기를 사는 주인공의 인생은 당연히 흥미롭기 마련이다.
최근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여성 서사가 연이어 해외 평단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는 4대에 걸친 재일한국인의 이야기를 시간을 따라가며 들려준다.
작품은 소설의 성공에 이어 애플 티비로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민진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계 미국인으로 역사학을 전공하며 재일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미국인으로 성장했기에 소설은 당연히 영문으로 쓰였고,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하기에 보편적으로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도 8 Lives of a Century-old Trickster라는 이름으로 먼저 출판되었다. 흥미롭게도 작가 이미리내는 한국 출신으로 20대까지 보통의 정규 교육을 받은 여성임에도 영문으로 먼저 소설이 탄생했다.
이주의 역사와 기독교적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는 『파친코』와 달리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조금 더 한국적인 시점의 식민과 분단의 역사를 중점으로 시대 속 인물을 그리고 있다. 두 작품은 모두 영문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나 작가의 성장환경, 이야기 전개방식 등에서 차이와 비교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여성 개인의 삶을 통해 엿보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공감과 위로를 건내고 있는 두 작품의 차분한 힘이 돋보인다. 이들은 한국적인 이야기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냈기에 더 멀리, 더 빠르게 전달될 수 있었다. 그 요인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가 원작인 점이다. 또한 어머니로서 딸로서 그려진 여성의 삶과 관계는 전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과 억압, 폭력전쟁 혹은 식민지배를 경험한 사람, 가정 폭력과 국가에의 억압 등 일상적이면서도 거대한 서사의 피해자였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