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느리지만 꾸준한 '달팽이 걸음' [미술/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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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李建鏞, 1942-)은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다양성을 확보했다고 평가받는 작가이다. 그는 황해도 출생으로 196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였으며 1969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수학했고 1982년 계명대학교 미술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1969년 ST(Space and Time)를 이끌고 AG(한국 아방가르드 협회)그룹에 참여했다. 이후 1981년 군산대 교수에 부임해 2007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설치, 조각, 퍼포먼스와 회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다루었다. 1971년 <신체항>으로 주목받기 이전, <구조>시리즈와 콜라주를 작업했으며, 1973년 ⟪파리비엔날레⟫의 경험으로 퍼포먼스로 영역을 넓힌다. 이후 1975년 <이벤트-로지컬> 연작을 발표하며, 신체와 공간, 관계, 논리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한다.
이듬해 발표한 <신체 드로잉> 연작은 작가의 몸에 더욱 초점을 맞춘 작업으로, 이건용은 신체와 드로잉 사이의 관계를 실험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다시 오브제를 중심으로 현실과 밀접한 주제를 다루며 작업을 변주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 전반을 되돌아본 전시로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달팽이 걸음_이건용展⟫이 있으며, 이를 계기로 이건용은 한국의 실험미술의 대표 작가로 다시한번 자리매김 하였다.
Ⅰ. 관계의 시작 <신체항>
ST 활동으로 철학과 이론을 탐구한 이건용은 ⟪제 10회 한국미술협회전⟫(1971)에서 <신체항>(1971)을 발표하며 작가로 입지를 다졌다. 바닥을 파내어 뿌리채 나무를 전시장에 옮겨놓은 듯 보이는 이 작품은 본래 존재하던 자연의 맥락을 벗어나 새롭게 그 존재를 인식하도록 만들고, 이는 그 사물이 원래 위치한 지점에서 이동하여 자연을 대표하는 의미론적 상징체로 역할한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의 제목은 신체와 장소의 관계를 탐구하게 만드는 데, 이때 장소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의 시공간을 너머 주어진 상황(조건)에 반응하는 과정으로서의 어떤 실재로 확장된다. 또한 <신체항>에서 나타나는 장소와 신체에 대한 탐구는 이후 이건용의 퍼포먼스와 회화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에, <신체항>은 그의 작업 전반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초기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한편 <신체항>에 대한 연구는 주로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와 이우환과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건용 역시 이우환의 직접적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이우환이 말하는 신체의 행위적이고 직관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험의 구조를 받아들인 이건용은 <신체항>을 통해 ‘나’와 ‘대상’이 만나는 접점으로 신체를 재인식하고 그것을 관계하는 ‘의식의 장’으로서의 장소를 새롭게 설정하려 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이 시기 그의 또 다른 입체작업 <체-71>(1971)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73년 이건용은 ⟪파리비엔날레⟫를 기점으로 <신체항>같은 오브제 작품에서 ‘이벤트’로 작업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에 대해 그는 파리에서 본 퍼포먼스에서, 그것이 정적인 장(場)에 놓인 입체물의 한계를 너머 행위와 장을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Ⅱ. 반복성과 논리적 사유 <이벤트-로지컬> 연작
이건용을 비롯한 ST 작가들은 1960년대를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상황에 따른 해프닝으로, 1970년대를 논리적으로 진행되는 이벤트로 구분하고 있으며. 해프닝과 본인들의 이벤트를 차별화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 ST 작가들의 이벤트에 대한 이해는 서구와 달랐다. 이벤트는 존 케이지와 플럭서스의 영향에서 그 용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내용으로 무작위성을 근거로 한다고 파악된다.
이렇게 용어의 의미가 혼용된 원인을 일본과의 연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치야나기 도시(一柳 慧, 1933-2022)와 오노 요코(小野洋子, 1933-)는 플럭서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하이 레드 센터를 비롯한 이들 도쿄의 이벤트 작가들은 자극적이고 연극적인 해프닝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한국의 작가들은 이러한 일본 미술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위와 같이 이벤트의 의미가 서구와 달랐음을 유추할 수 있겠다.
1975년 백록화랑에서 열린 ⟪오늘의 방법전⟫에서 이건용은 <이벤트-현신(現身)>(1975)을 발표했다. 후에 <동일 면적>과 <실내 측정>으로 명명된 이 퍼포먼스는 동일 행위를 반복하는 특징을 보이며, 이 작업에서도 이건용은 지속적으로 공간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이벤트-로지컬>연작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반복성에 대해 강혜승은 동일성을 만들어내기 위함이 아닌 차이를 빚어내는 과정으로 설명하며 이는 <건빵 먹기>(1975) 등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건용은 이벤트에 로지컬을 덧붙이며 논리성을 강조한 바, 그의 퍼포먼스를 논리적 사건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행위 자체를 정확히하는 논리임을 밝혔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이벤트-로지컬>은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익숙한 신체적 행위와 그 행위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Ⅲ. 신체적 회화 <신체 드로잉> 연작
1976년 ⟪제 5회 ST전⟫에서 발표한 <신체 드로잉> 연작은 행위와 회화의 접점에 있는 작품으로 이건용의 작품 전반에서 가장 주목받는다. 이 작업들은 행위와 평면이 만남으로써 함께 이루어지는 드로잉 퍼포먼스로, 신체의 한계를 인식하며 신체가 만들어낸 흔적과 선의 구조이다. 다시말해 이 드로잉은 기존의 방법처럼 그리기의 흔적이 아닌 신체와 행위의 흔적으로 그 의미를 갖는다. 앞서 살펴본 <건빵 먹기>에서 신체에 제한을 가한 퍼포먼스는 <신체드로잉 76-4>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건용이 행위와 회화의 관계 속에서 기존과 다른 그리기 방법을 시도한 것은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6),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의 사례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들과 비교하여 이건용의 작업에서 주목할 지점은 캔버스와 눈의 위치이다. 이건용은 화면을 마주보지 않고, 화면의 뒤에서 옆에서 작업을 만들어내며, 이는 원론적으로 작품의 생산의 가능성을 재고하고, 작품 창작에 민주적인 참여를 갖는다고 평가된다. 또한 이건용에 따르면 이것은 이성 중심의 서양 근대 철학을 반성하며, 신체에 대한 인식과 체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신체항>과 그 기본적인 발상을 같이 한다.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학자 양정무에 따르면 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손이 가는 대로 그리는 방식인 반면, 이건용의 경우는 그리는 행위가 체계화되어 있고, 매 행위의 일정한 반복이 이루어 진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이건용의 대표작 <달팽이 걸음>(1979)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업은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긋기와 지우기가 동시에 반복되며, 웅크린 신체라는 제한 속에서 이건용은 느리지만 긴 시간성을 제시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달팽이 걸음>은 이건용의 작업세계 전반을 함축하는 작품으로 유비된다. 그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본인의 미적 논리를 이끌고 가며 현재까지도 활동하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일상적인 삶의 의미를 찾고자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작업부터 항아리, 신문지, 주방용품 등 일상적인 삶의 의미가 담긴 오브제를 활용하였다. 1989년의 개인전에서 그는 플라스틱 물병에 한강 물을 채워 매달고 이를 비누와 함께 설치하는 등 오브제를 일시적인 상황에 위치시킨다.
이건용은 “인간이 살아있는 곳은 인간의 메시지가 풍부하기에 구태여 예술을 따로 찾아나설 필요가 없으며, 인생은 짧고 예술도 소멸한다”고 도발적인 선언을 한다. 이는 작품의 한시적인 성격을 가리키며, 예술과 삶이 유리된 것이 아니라는 작가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전다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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