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 속 수치심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압살롬, 압살롬!>의 악인 서트펜 대령은 남북전쟁 시기의 백인이다. 흑인 인종차별은 물론 여러 불결한 일들을 저질러 소설에서 악귀라고 불리는 그는 내면을 알 수가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소설 중반, 그의 경험이 하나 소개된다.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한 백인의 저택에 방문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심부름 때문이었는데, 그는 그 저택의 문을 두드리고선 곧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나온 건 흑인 노예다. 그 남자는 부유한 백인의 노예라서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남자가 어린 서트펜에게 말한다. 뒷문으로 들어오라고.
그는 입장을 거부당한 것이다. 이 경험은 수치심으로 농축되었고 그는 아주 큰 계획을 세우게 된다. 대농장, 백인 아내, 백인 아들, 흑인 노예를 소유한 사람이 되겠다는 계획을. 그는 그 계획을 갖고 평생을 살면서 소설에서 소개된 이상한 짓들을 저지른 거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못된 서트펜이 그 경험에서 느낀 수치심만큼은 이해가 갔다. 나에게 인종적, 신분적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경험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왜일까.
나는 <압살롬, 압살롬!>을 최근 독서 모임에서 읽었다. 모임장인 소설가분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 서트펜을 비롯해 이상한 짓을 저지르는 남성 인물들은 왜 이리 수치심을 느낄까요? 나는 그때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러나 있는 게 확고한 어떤 것이 훼손되었다는 걸 느끼는 데서 수치심이 온다고. 그러면서 전에 읽은 작품들이 떠올랐다.
프란츠 카프카의 걸작 <소송>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송에 휘말린 K의 이야기로, 그는 관료제의 부조리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만 다니다가 최후를 맞이한다. (미완성 장은 제외하고) 최후의 문장은 이렇다.
K는 흐려져가는 눈으로 두 남자가 바로 자기 눈앞에서 서로 뺨을 맞대고서 최종 판결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 (문학동네, p.287)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는 흑인 용병 오셀로의 이야기다. 그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부하 이아고의 간계에 빠져 열등감과 수치심, 질투 때문에 아내를 죽이고 만다.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를 통해 이아고의 간계에 농락당했음을 알게 된 오셀로는 전보다 더 강한 수치심에 휩싸인다.
존 쿳시의 문제작 <추락>은 남아공 백인 남성 교수 데이비드가 제자와의 성관계로 인해 교수 자리에서 쫓겨난 후의 이야기다. 소설의 주된 사건은 그의 딸 루시가 강도들에게 강간당하면서 벌어진다. 그 사건으로 데이비드는 엄청난 수치심에 휩싸이는데, 문제는 그 딸이 그 강간 사건을 스스로 안고 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치욕’이었다.
돌아보면서 나는 확신했다. 물리적 폭력을 제외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감정이 이 수치심이라고. 다르게 말하자면, 이제 소개할 책의 제목 <굴욕>이라고.
2. 굴욕의 대가가 되려면

“정숙한 독자여, 당신이 나의 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부디 성냥불로 이 지면에 구멍을 내라. 분서자가 되라.”라고 요구하는 책이 있다면 당신은 마저 읽을 것인가, 아니면 책을 덮고 구멍을 낼 것인가. 마음 약한 독자를 생각해 이런 조건을 덧붙인다면?-“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지면에 이 책의 글자들을 블록체 대문자로 옮겨 적으라. 나의 대필자가 되라. 나의 굴욕당하는 필경사가 되라.”(p.220)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이미 책 후반부이니 굴욕당하는 필경사가 된 상태로) 책 표지를 장식하는 구멍의 정체가 무언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불결한 구멍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 불로 지져서 난 구멍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물론 책 표지의 구멍은 타일 가운데에 난 거라 불로 지진 흔적이 아니겠지만). 구멍은 불결한 연결의 흔적이자 훼손의 흔적이라고. 나는 그게 바로 굴욕의 정의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11파트의 ‘푸가’로 이뤄져 있지만, 파트마다 중심 소재가 있기는 하되 서로 간의 큰 차이는 없으며, 굴욕에 관해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분류하는 책은 아니다. 작가의 목적은 단 하나다. 굴욕을 파고드는 것. 작가는 굴욕을 파고들기 위해 티브이 쇼, 문학, 학자, 정치인, 예술가, 연예인, 노예, 홀로코스트, 유대인, 온라인, 일상생활 등등 살면서 보고 들은 타인의 굴욕만이 아니라 자기가 겪은 내밀한 굴욕까지 전부 소개한다. 누군가는 읽으면서 내가 이런 것까지 읽어야 하나? 생각할 수도 있다. 작가는 중간에 독자에게 사과하기도 하는데(“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게 해서 미안하다.”(p.79)), 하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말한다.
“정숙한 독자여, 이런 나와 다를 것이 없는 자여(진하게),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경솔한 돼지여, 내가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창피를 당하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건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다. 굴욕의 전문가라는 내 진정성을 증명하려면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어놓아야 하니까.” (p.174)
작가는 스스로 심문대에 올라가기 위해 굴욕이라는 죄를 짓고 있다(정확히 말해 자백하고 있다). 나는 서로 다른 질감의 굴욕을 하나로 엮어내는(일상의 굴욕과 성폭력의 굴욕을 한 줄기로 엮어내는 등) 그의 용기와 거침없음에 놀라면서 읽었는데, 그러다 그 진정성의 끝에서 충격 이상으로, 마치 카타르시스처럼 어떤 한계를 넘어서서 안정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왜냐하면 굴욕이 지나갔을 때, 굴욕이 과거가 되어버렸을 때의 속 시원함과 실은 아무것도 아녔음을 나도 뒤늦게, 자주 느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것을 굴욕의 구원이라 부른다(‘속뚫림 예배’라고 표현한다)
“굴욕이라는 회색 구름에 은색 테두리가 없다면, 내가 이 음울한 경험 범주를 이렇게 검토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굴욕이라는 유해한 구름 아래 서 있는 사람에게는 경우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어떤 신적 변모의 가능성이 주어진다.” (p.129)
“굴욕의 (조용한, 영원한) 한 점은 결코 변하지 않으니, 우리는 그 안에 다시 들어가볼 수 있을 뿐이다. 또 한 번 그 이상한 호텔에 묵으면서 숙박부에 이름을 올리고 얇은 제병을 먹고 익숙한 맛의 포도주를 마실 수 있을 뿐이다. 영성체는 언제나 가능하다. 굴욕의 대문은 늘 열려 있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끔찍한 그곳을 다시 찾아갈 때, (굴욕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찾을지 모른다.” (p.84)
결국 작가는 굴욕의 대가가 되어 굴욕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려고 하는 거다. 하지만 그 길은 험난하다. 우리는 정말 많은 민망하고 낯 뜨겁고 충격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마주해야 한다. 인간사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굴욕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3. 인간의 조건 : 신체와 언어
작가는 굴욕은 신체와 언어에서 기인한다고 이야기한다. 키, 몸무게, 생김새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의 특징. 내가 늙어 누군가에게 짐이 되며 죽어가는 일. 내 생각이 글로 표현되어 남에게 읽히거나, 아무리 용써도 표현되지 않을 때. 나의 조건이자 한계가 모두에게 드러나는, 드러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의 굴욕.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이 굴욕을 초래하는 셈이니 굴욕은 보편적이고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나나 당신이나 매한가지다.
이 책은 굴욕의 고발적인 면과 예술적인 면의 기묘한 조화를 보여주는데, 신체에 있어선 고발적인 면이 담겼다. 내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타인을 굴욕적으로 보는 눈(짐 크로 눈총)이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유전적, 인종적, 계급적, 신분적 증거. 거대한 차별의 톱니바퀴가 되어 있는 나라는 진실. 비체, 비주체화 되었을 때의 참담함. 그런 불편한 진실이 흑인들의 집단 린치나 절멸 수용소 등의 예시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다(미국 TV쇼와 언론이 시청자에게, 출연자에게, 다양한 인종의 사람에게 가하는 굴욕도 여기 포함된다).
특히 푸가 9 <질 좋은 유대인 원단의 덮개>에서 나치 예술가, 시인, 아프리카 노예 여성, 일상에서 목격한 굴욕 등이 열거되다가 예수가 마리아에게 가한 굴욕을 거쳐(“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부분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어머니 거트루드에게 하는 대사를 떠오르게 한다 “정숙하지 못한, 그대 이름은 여자-”) 이 모든 걸 한데 묶어 굴욕의 근본적 원인을 지적하는 마지막 부분(“가까운 곳에 서 있는 두 인간에게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이거나 깎아내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p.195))에서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책의 날카로움에 숨이 가빠지는 경험을 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어의 굴욕 부분에도 많은 공감이 갔다. 이 부분은 예술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언어의 굴욕을 이야기하기 위해 후반부에서 언어 예술가들을 많이 소개한다. 사디스트 사드 후작, 마조히스트 장 주네뿐만 아니라 내가 최근에 푸코의 글에서 관심을 갖게 된 앙토냉 아르토, 작년 동대문에서 전시회를 했던 바스키아도 소개돼서 흥미롭게 보았다. 그들은 모두 굴욕을 너무나 잘 느꼈기에 예술로 정면승부를 하거나 굴욕의 추를 미로 바꿔 표현했다. 이 점에서 탐미주의자 미시마 유키오도 여기에 썩 어울리고,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만든, 부끄러움의 시인 윤동주도 포함될 법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언어가 할 수 있는 일은 실패하더라도 증언하여 돌파하는 것뿐이다.
“문학은 작가가 작품을 쓰는 과정 그 자체로 인해 굴욕당했다는 사실을 증언해야 한다. 언어를 생산하는 일(단어들을 사건으로 만드는 일)은 정액 묻은 내 옷을 법정에서 공개하는 일이나 내 입속을 판사에게 열어 보여주는 일과 마찬가지로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언어는 초월하지 않는다. 모든 문장은 자신만만한 성숙함이라는 충전재와 커버로 구성되어 있다 해도, 우리가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없었던 그 옛날의 유아기를 증거한다.” (p.70)
4. 세상사 : 타인의 굴욕 + 나의 굴욕

이 책은 굴욕이라는 감정의 정의와 분류, 수식과 상관관계를 명료하게 짚어내는 책은 아니지만 온갖 세상사와 연결되어 있다. 굴욕이 앞서 언급한 수치심, 치욕만이 아니라 부끄러움, 죄책감 등등 다양한 감정과도 연결되는 핵심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들이 촉발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세상사라는 큰 그림이 자연스레 그려질 것이다.
세상사를 일으키는 인간은 굴욕에 관해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라는 세 부류로 나뉘는데, 누구도 세 부류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굴욕을 주거나, 느끼거나, 보거나, 혹은 줌으로써 느끼거나, 느낌으로써 주거나, 봄으로써 상상함으로써 주거나 느끼게 된다. 모든 역사가 거기서 시작되었고 모든 현재가 그 때문에 이 난리이며 모든 미래도 어쩌면 그 때문에 좌지우지될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정말 다양한 사례를 통해 채찍 맞듯이 아프게, 비가 퍼붓듯이 굴욕을 배웠다. 타인이 굴욕을 느끼지 않게 더 섬세해지고 예민해지는 법을, 내 앞에 놓인 굴욕을 통과하는 방법을 오래오래 생각하게 될 거 같다. 읽기가 더딘 책이지만 빠져나오기는 더더욱 더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