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변화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법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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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습관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19세기 초 일어난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은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의 등장을 경계해, 대상 자체를 파괴하는 형태로 일어난 사회운동이다. 1811년부터 산발적으로 폭력투쟁이 반복되며, 새로운 자극이 심어질 때 인간 사회가 느끼는 공포감을 여실히 보여줬다.
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은 노동조합이 협상을 이끌어내고, 이를 문서화하는 변화를 이끌어내며 변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단체교섭권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는 변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훗날 사회의 모습을 결정짓는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본질에 있다. 러다이트 운동이 선한 영향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운동의 방점이 기계에 대한 적대감에서 노동의 숭고함으로 적절히 옮겨갔기 때문이다. 다방면으로 변화의 불씨를 투척하며 전 세계를 들썩였던 파리 올림픽을 주목해야 할 이유다.
프랑스는 ‘프랑스다움’을 설파하는 데 올림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개막식 장소를 스타디움이 아닌 센강으로 낙점했다. 선상 행진을 통해 각국 선수단을 소개하고, 복면 주자가 성화를 손에 안아 들고 파리 시내 옥상 이곳저곳을 누볐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수하던 노동자들이 춤을 추고,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워킹을 하는 모델들의 모습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윽고 각각의 문화유산 안쪽으로 시선을 돌려, 경기장을 올림픽의 무대로 초빙했다. 아치 형태가 돋보이는 앵발리드에서는 한국이 5관왕을 차지한 양궁 경기가 열렸고, 드높은 천장의 그랑 팔레에서는 펜싱 경기가 열렸으며 비치발리볼 경기는 에펠탑을 조명 삼아 큰 화제가 됐다. 이처럼 프랑스의 향기가 온 세계에 퍼지도록 한 이 모든 시도가, 이전의 올림픽에서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파리 올림픽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올림픽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번 올림픽을 돌아보는 시선 중 기이하다, 혹은 프랑스의 정신적 자살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거론될 정도다.
미숙한 면모가 다수 엿보인 점은 사실이다. 국가명을 오기하는 실수부터 시작해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담고자 한 개막식이 다소 난잡한 인상을 주었고, 친환경을 이유로 선수들에게 잠깐의 에어컨 가동조차 허용하지 않았으며 센강 수질 문제는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다. 이번 올림픽뿐 아니라 프랑스가 줄곧 손가락질 받아온 엘리트 PC주의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린 이벤트는 머리가 잘린 채 등장한 마리 앙투아네트, 드랙퀸(여장남자)이 자리를 채운 최후의 만찬 등이다.
나아가 일명 ‘말썽쟁이’ 올림픽이라는 낙인이 이미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파리 올림픽은 진행 미숙이나 사상의 충돌 건뿐만 아니라 의외의 측면에서도 비판받았다. 개막식과 달리 이번엔 스타디움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꾀한 폐막식이 그렇다. 프랑스는 예술과 자유의 나라라는 국제적 명예에 부합하고자 춤으로 장식한 오륜기를 천장에 올려보냈으며, 불타는 피아노를 거슬러 오르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선보였다. 하지만 프랑스 특유의 음침한 예술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는 신랄한 비판을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논란을 뒤집어보면 본질이 보인다. 파리 올림픽이 추구한 변화의 물결은 표면을 건드리는 각종 논란으로 인해 핵심을 가로지르는 물줄기가 상당히 가려졌다. 물론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잡음을 비판하는 것은 지당하며, 개선점을 곱씹어볼 법하다. 하지만 그 비판이 새로운 시도 자체를 겨냥하는 경우 얘기가 달라진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불편한 감정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 끝에 이뤄질 혁신의 메시지가 가려진다는 의미다.
파리올림픽은 친환경/저탄소 올림픽을 추구하며, 기존 대회 탄소 배출량의 절반 수준인 158만 톤을 목표로 잡은 채 막을 올렸다. 이를 위해 문화유산을 활용해 임시 경기장을 없애고, 새로이 구축한 경기장에는 친환경 건축을 적용하는 등 다방면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에어컨을 없애고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운영한 선수촌의 경우 올림픽의 주역인 선수들의 숙식 환경을 고려해 더 성숙한 방식이 요구되나, 친환경을 표방한다는 당초의 의의는 변하지 않았다.
개막식에서 채택한 풀이법 역시 종교 비하 등 논란의 불씨를 제공했지만, 소외된 이들을 포용하려는 근본적인 메시지만큼은 명백했다. 또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남녀 선수 출전 비율을 50%씩 맞췄다. 전통적으로 남성 마라톤이 갈무리의 역할을 하던 폐막식엔 최초로 여성 마라토너가 단상 위에 올랐다.
어딘가 음침하다는 지적으로 한데 묶인 ‘프랑스 예술’에 대한 비판 역시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올림픽을 주최하는 국가가 나라의 예술관을 보여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파리는 이미 새로운 형태의 퍼포먼스를 비롯해 경기장을 빛낸 문화유산 등 고유성을 입증할 요소들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변화의 구심점을 잘 포착하고, 이를 잘 제대로 된 방식으로 수용할 때 사회는 올바르게 발을 내디딘다. 이번 파리 올림픽은 미숙하고 투박했지만, 뒤따를 변화의 원천이 됐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과감히 인정하고, 변화의 출발선에는 밑줄을 그어주는 태도를 견지해야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세계의 대축제, 올림픽이 더 빛나는 모습으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서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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