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쥴 앤 짐'의 한 사랑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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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영화에 관한 스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쥴 앤 짐>은 1912년 파리를 배경으로 둔 프랑스 누벨바그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의 로맨스 영화다. 금발 머리에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인 독일인 쥴이 까만 머리에 콧수염이 매력적인 프랑스인 짐과 우연히 만난 후 깊은 우정을 맺으며, 마치 사나이의 우정을 그려낸 영화인 듯 둔갑한 채 시작한다.
이윽고 둘은 매혹적인 미소를 가진 조각상과 똑 닮은 신비로운 여인 카트린을 만나 사랑에 빠지며, 카트린을 향한 적극적인 애정 공세로 쥴이 '먼저' 카트린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카트린은 쥴과의 사이에서 권태를 느끼며 전개에 큰 변화가 인다.
일명 규정짓지 않은 사랑이 자리 잡는 것은 이때부터다. 카트린은 오랜만에 그들을 찾아온 짐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세 사람은 동거에 들어간다. 세 사람 사이에는 각자의 주변인과 더불어 집착과 질투가 비집고 들어오게 되며, 예측불허의 방식으로 서로 간의 관계를 이어 나간다.
쥴앤짐이 앞다퉈 사랑한 여인, 카트린의 시각에서 그가 자신의 연인을 대하는 가치관을 살펴봤다.
평등을 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카트린
카트린은 가정을 이루는 한 명의 여성으로서, 가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감보다는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평등함을 추구했다. 이는 그녀가 이따금씩 언급하는 ‘원점’이라는 단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극 중 카트린의 연인이자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쥴과 짐 역시 ‘원점’이라는 명목하에 한 번씩 그녀를 다른 남성의 품에 안기는 경험을 거쳤다.
카트린은 그녀를 향한 시댁의 공세를 막지 않은 쥴, 질베르트(짐의 전 연인)와의 관계를 마무리 짓지 않은 짐에게 귀책이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카트린이 지적한 두 사람의 행위 간 공통점은 모두 여성이 연인과 부부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문제라는 점이다. 카트린이 쥴과 짐에게 반발감을 표현한 기저에는 남편의 집안, 즉 시댁에서 이제 막 식구가 됐을 뿐인 여성을 소유물로 여긴 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사회적 역할을 거부하는 것을 비롯해 잠재적 불륜 상대와의 관계를 차단함으로써 배우자로서 존중받겠다는 심리가 깔려있었다.
그녀는 극 중 남성들이 보이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극도로 혐오했다. 카트린의 이러한 가치관은 영화로 하여금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간주하고, 남성을 여성의 우위에 두던 당시 시대상을 비판하는 사회 고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카트린과 쥴 사이에 발생한 갈등 역시 이를 근간에 두고 있다. 카트린이 쥴, 짐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던 중 쥴이 “여성은 어리석음과 타락의 결합체”, “여성이 교회에 들어가도록 허용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들이 신과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등의 연극 대사를 인용해 말하는 것을 듣고 강에 몸을 던진 행위는 그 대표적인 예시다.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카트린은 자신의 여성으로서 위상이 침해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불안에 굴레 속에 매몰된 카트린
카트린은 극 내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충동적인 데다 규정지을 수 없는 성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유로운 삶을 지향한다. 그녀의 대사 중 “완전한 사랑은 오직 한순간”이라는 말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면모는 그녀를 표현이 명확하고 주체적인 매력적인 여성으로 만들어주는 반면, 잡히지 않는 짐과의 관계에 깊은 불안감을 느끼도록 해 그녀를 집착에 몰아넣기도 한다. 카트린이 옛사랑의 편지들을 태울 때 그녀의 잠옷에 불이 옮겨붙는 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파괴시키고 자신도 그 파괴의 과정 속으로 연루되어 들어감을 암시한다.
그녀의 이러한 불안정한 심리를 표현하는 미장센으로 ‘편지, 차, 책’을 꼽을 수 있다.
첫째로 ‘편지’는 카트린의 심리적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매개체에 해당한다. 특히 카트린과 짐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카트린의 임신을 둘러싼 두 사람의 격한 감정변화를 관객에게 여과 없이 전달한다.
영화는 쥴이 카트린에게 절절한 편지를 보내는 장면만을 삽입할 뿐, 이에 카트린이 보이는 반응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달리 말해 카트린이 쥴이 편지를 통해 표현한 애정에 이렇다 할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카트린은 짐과 편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예민한 감정선을 드러낸다. 이는 쥴과 연인일 시절보다 더욱 흐트러진 카트린의 모습을 상징한다. 특히 짐이 질베르트와의 관계를 끊지 못한 채 ‘작별 건수’를 언급하며 카트린에게 돌아오는 날을 끊임없이 늦출 때, 카트린의 감정은 극에 달한다. 카트린은 짐의 편지를 곱씹으며 쥴에게 세 차례에 걸쳐 ‘짐이 날 사랑한다고 생각해?’라는 물음을 던진다. 해당 대사의 청자가 쥴이라는 설정도, 말을 꺼내는 시점까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옛 연인에게 뱉는 말이라는 점에서 앞선 태도와의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시대 현실을 반영해 편지의 전달에 4일의 격차가 존재했던 것 역시 두 사람 사이 오가는 감정표현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 짐과 카트린의 서로를 향한 감정은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급기야는 짐의 출발을 막기에 이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유발하기까지 했다.
카트린의 ‘차’ 역시 불안정한 심리를 상징한다. 카트린이 이따금씩 시동을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작동시키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탑승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느끼는 불안감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카트린이 짐이 창문을 통해 내려보는 와중 숙소 인근 나무를 빙빙 도는 장면은 카트린의 심란한 내면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 장면에 해당한다. 특히 짐과 카트린이 함께 강에 빠지는 결말까지 견인했다는 점에서 카트린의 감정에 동화된, 분신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카트린의 감정은 쥴과 짐이 영화 내내 놓지 않은 절친한 관계와 얽혀 더욱 심화된다. 쥴과 짐은 극이 시작할 시점부터 절친한 관계를 이어왔다. 삼각관계를 다룬 흔한 영화들이 취하는 결말과 상이하게도, 끝까지 두 사람은 우정을 지켰다. 특히 쥴은 카트린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괜찮다며 짐에게 자신의 연인을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짐과 쥴이 항상 서로의 심리를 이해하고, 탓하지 않는다는 점이 삼각관계 영화 클리셰를 깨며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쥴과 짐이 함께하는 게임은 두 사람 간 우정을 형상화한 미장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둘은 가끔 카트린 옆에서 게임을 하는데, 쥴은 이 순간만큼은 그토록 순종하는 카트린의 말에도 빠르게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로 승부를 겨누는 게임의 기본적인 속성 자체도 한 여자를 두고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두 사람의 우정은 카트린과 형성한 관계로까지도 연결된다. 특히 세 사람이 다리에서 달리기를 하는 장면은 카트린에게까지 연결된 그들의 우정을 형상화한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너무도 소중하기에 함부로 내칠 수 없고, 그렇게 카트린의 감정은 서서히 곪아 짐과의 동반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영화의 주인공, 카트린
<쥴 앤 짐>은 당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감정에 잠식돼 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카트린은 명확하게 자신의 의지와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불안감을 없애지 못했고, 이는 그녀의 감정을 좀먹었다.
짐과 카트린의 복잡한 관계와 이로 인해 촉발된 카트린의 불안감은 두사람을 죽음에 몰아넣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결국 카트린은 죽어서야 짐이 늘 자신의 곁에 있다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죽음에 덤덤한 태도로 동반하는 짐과 이를 지켜보는 쥴은 세 사람의 성격과 관계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카트린은 늘 그렇듯 짐의 사랑을 갈구했고, 짐을 향한 사랑과 집착은 그녀와 짐을 함께 죽음의 곁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쥴은 극의 초반부부터 쭉 이어왔던, 카트린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짐과의 우정을 두 사람이 목숨을 잃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켰다.
‘쥴 앤 짐’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중심인물은 카트린이다. 영화에서 카트린은 늘 주체성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에 늘 솔직했고, 여성을 폄하하는 발언 및 태도에 거리낌 없이 맞섰다. 그녀가 쥴과 짐, 그리고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한 알베르 등 뭇 남성들에게 보인 행동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스스로의 주체성을 지키고 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모습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김서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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