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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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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계절마다 생각나는 아티스트들이 한 명 혹은 한 팀 이상씩 있다. 장마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7월, 여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는 '더 발룬티어스(이하 TVT)' 를 떠올린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들의 음악을 반복적으로 찾아 듣기 시작한다. TVT 음악의 농도는 여름에 가장 짙다.

 

21년에 발매된 첫 번째 정규 앨범을 들으며 세 번의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24년 6월 25일 TVT의 새로운 ep 앨범 “L” 과 함께 여름을 맞이했다. 이번 여름 그리고 앞으로 있을 수십번의 여름을 그들의 앨범 “L”과 함께할 생각에 무척이나 설레고 두근거린다.

 

더 발룬티어스는 죠니(기타), 김치헌(드럼), 백예린(보컬) 3인조로 개편되어 돌아왔다. 멤버 4명의 사진이 앨범 커버인 정규 1집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구름의 탈퇴는 와닿지 않는다. 게다가 이전과 다름없는 완벽한 사운드의 앨범을 발매했으니 한 명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일 수밖에.

 

TVT는 백예린 밴드라고 종종 소개되곤 한다. 물론 백예린이 유명하기에 그녀를 앞세워 소개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긴 하지만,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순 없다. 백예린의 솔로곡 못지않게 TVT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으며, 백예린뿐만 아니라 죠니와 김치헌도 각자 엄청난 매력이 있느니, 앞으로는 개인보다 밴드 전체에 더 관심을 두길 바라는 마음이다.


타이틀 곡 “L”의 첫 소절 가사 It always starts with an L에서 비롯됐다는 앨범 제목은 "L"이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시작된다는 큰 주제를 내포하고 싶었다고 한다. "L" 속에는 5곡의 노래가 들어있다.

 

 

 

Starfish on your head

4번째 수록곡, 이번 앨범의 최애 곡


 

 

 

종강과 자격증 시험 그리고 친구들과의 마지막 인사까지 나눈 1년간의 어학연수가 막을 내린 날, 나는 "L" 앨범을 찬찬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백예린의 나른하지만, 반짝이는 목소리로 시작되는 Starfish on your head”를 듣자마자 이 곡이 이번 앨범 나의 최애 곡임을 직감했고, 얼마 안 가 이 곡을 나의 두 번째 학기 테마곡으로 정했다.

 

1년간 연휴 때마다 심지어 연휴가 아닌 보통의 날들에도 나는 유럽 다른 국가들을 여행했다. 유럽 유학생들에게 유럽 여행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고, 실행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아주 가끔 여행이 의무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여행을 억지로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 자신도 이 시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과감할 것임을,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무의식중에 매번 느끼고 있었다. 언제 또 유럽 국가를 5만 원짜리 비행깃값으로 갈 수 있겠는가, 언제 또 하루에 5만 보를 걸으며 2박 3일 덴마크 여행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후회 한 톨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 정말 부지런히 다녔다. 결국 '유럽' 하면 생각나는 나라들은 거의 다 갔다 왔다.

 

폴란드는 5월 말 Boże ciało(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로 인해 4일간 연휴였다. 이 기간은 내게 주어진 폴란드에서의 마지막 연휴이기도 했다. 너무나 고맙게도 폴란드 친구가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해왔다. 우리는 내가 가보고 싶었던 스톡홀름과 스톡홀름에서 정말 가까운 폴란드 그단스크로 여행을 떠났다.

 

북유럽을 좋아하는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스톡홀름을 안았다. 깨끗하고, 깔끔하고, 평온하고, 잔잔했다. 인생 첫 전동킥보드를 타고 스톡홀름을 누비며 느꼈던 기분 좋은 일렁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공항 열차 시간을 기다리며 강가에 앉아 글루텐 프리 머핀을 먹은 순간도. 당일치기 여행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그날 저녁 우린 비행기를 타고 그단스크에 도착했다. 그단스크부터 합류하는 폴란드 친구 한 명이 버스정류장에서 우릴 반겼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여행 가신 친구의 이모께서 집을 내어주셨다. 우린 그 집에서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정말 소중한 2박 3일을 보냈다.


그단스크는 폴란드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발트해 연안에 있어서 폴란드의 휴양지로 유명하다. 폴란드 어학연수 여름 학기에 이곳에서 수영하는 것이 나의 로망이었다. 둘째 날 우리는 납작 복숭아, 자두, 과자 등을 챙겨 해변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로망을 실현했다.



한국 해수욕장엔 강렬한 태양을 피하려는 이들을 위한 파라솔이 빽빽하게 서 있다. 햇빛으로부터 사람들을 숨겨주려는 파라솔들의 노력이 멀리서 보면 답답해 보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단스크 해변에선 파라솔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인들의 피부 특성상 그들은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태양 빛을 온몸으로 반긴다. 그 덕분에 나는 탁 트인 바다와 하늘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가만히 모래 위에 앉아 순간을 안으며 느낀 감정이 Starfish on your head를 들으면서 다시 살아났다. 매번 살아난다.

 

그때 내가 얼마나 평온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거다. 그때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거다. 그때 나는 나의 1년간의 어학연수 생활을 돌아봤다. 당시엔 아직 한 달이 더 남아있었지만, 아쉬운 게 없다고 이미 결론을 지었다. 인생에서 도전해 보고 싶었던 것들을 해냈고, 원하던 수준의 레벨에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여행도 많이 다녔고, 새로운 친구들과 소중한 추억도 많이 만들었고, 집순이인 내가 밖순이처럼 살았다. 가을·겨울보다 해가 긴 봄·여름의 날씨 덕분에 겨울 학기보다 여름 학기가 조금 더 뿌듯했다.

 

1년 간의 해외 생활은 내게 용기를 줬고, 행복을 줬고, 욕심이 생기게 했다. 한국에 돌아가서의 삶이 기대됐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행복 총량의 법칙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너무 행복하면, 어려움이 생겼을 때 더 크게 가라앉을 것만 같은 무서움.

 

이 곡의 가사는 그때 내 생각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더욱더 이 노래에 애정이 간다. 나를 닮은 노래라서.

 

 

"I see a starfish on your head

That means we had such a great summer

I see dreams brimming in your eyes

That means we'll have a good autumn

(네 머리에 불가사리가 보여.

그건 아마 우리가 너무 좋은 여름을 보냈다는 거겠지.

난 너의 눈에 꿈이 가득 찬 것도 보여.

좋은 가을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일 거야.)

 

A storm follows after a sunny day

Well, what did you expect? She said,

The sadness trails behind this happiness

I'm sorry if you wished for something else"

(맑은 날이 지나고 나면 폭풍이 뒤따를 거야.

음, 기대한 게 뭐냐고?

슬픔은, 이 행복 뒤에 있어

다른 걸 바랐다면 미안해.)

 

The volunteers (더 발룬티어스)- Starfish on your head

 

 


Tell'em boys

세 번째 트랙, TVT가 돌아왔다.


 

밴드 드럼은 가장 쉽게 나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음악 소리 중 하나이다. 드럼이 두드러지는 밴드 곡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시끄러운 곡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나름의 취향 기준이 있는 나에게 Tell'em boys는 아주 사랑인 곡이다. 처음부터 드럼이 달린다. 그리고 약간 들뜬 듯한 백예린의 목소리는 이 곡을 신나지만 시끄럽지 않은 곡으로 만들어준다. 정규 앨범과 가장 결이 비슷한 곡이 아닐까 싶다. 여름 페스티벌에서 방방 뛰며 즐기고 싶다.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에서 더위를 날리고 싶을 때 들으면, 보송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TVT의 자신감이 보인다. 우리가 돌아왔다고. 이번 여름은 우리와 함께 보낼 수밖에 없을 거라고.

 

 

Tell'em boys, I am back

(얘들아, 내가 돌아왔다고 전해줘)

 

Burn the city to this track

(이 노래로 도시를 불태워줄게)

 

 

 

"L"

타이틀 곡, 사랑이란 단어가 시옷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이번 앨범 "L"과 동명의 제목인 마지막 트랙, 타이틀 곡 "L"이다. 컨셉 영상이 공개되고 난 후, TVT의 새 앨범에 대한 나의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이 곡은 사랑에 대해 말한다.

 

 

 

 

l에게

 

그녀의 이름은 어떤 글자로 시작하든 사실 상관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포함한 이 모든 게

시옷으로 시작해 사랑이란 단어가 되어갈 걸 알았으니깐

그게 그녀의 이름이 되었고

그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게 되었다.

 

"L" 컨셉 영상 중

 

 

어렸을 때 받은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뿐이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무한정의 애정과 사랑을 영원히 줄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들. 아니, 기대가 아니다. 기대보다 더 나아가, 영원토록 줄 것으로 믿어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점점 커가면서, 점점 다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우린 다른 형태의 사랑이, 사랑에 다른 모습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유지혜 작가의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책의 문단이 떠올랐다.

 

 

면밀히 사랑을 살펴보니, 사랑의 부드러운 인상은 단편적인 오해였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에는 웃는 얼굴만 있지 않았다. 어떤 경험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홀로 견뎌 온 시간과 후회, 머뭇거림, 뒤에 숨은 슬픔과 아픔까지도 그것에 포함이었다.

 

유지혜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3곡을 뽑아 글을 썼지만, Velvet Glove, Psycho, Tell'em boys, Starfish on your head, "L" 5곡 모두 다 추천한다.

 

더 발룬티어스의 앞으로의 행보를 응원한다. 그들의 음악과 함께 여름을, 그리고 다른 계절들을 머금고 싶다. 그러니 부디, 하고 싶은 음악을 맘껏 펼쳐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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