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화석 자본'의 소개 [도서/문학]

책 <화석 자본 (Fossil Capital)> (안드레아스 말름, 2023)
글 입력 2024.06.0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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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글을 쓸 때 제목을 꽤 고심해서 짓는다. 글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이런저런 단어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 보며. 거의 항상 애초의 의도보다 거창한 제목이 나와버려서 내가 봐도 같잖을 때가 많다. 그런데 이번엔 어렵지 않게 힘을 빼고 쉽게 읽히는 제목을 단번에 정했다. 지금 얘기해 보려는 책의 제목, “화석 자본”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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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결한 어구를 처음 봤을 땐, 그리고 이어서 “증기력의 발흥과 지구온난화의 기원”이라는 부제와 이어봤을 땐 놀랍도록 도발적이라고 느꼈다. 지구온난화의 기원을 화석 ‘자본’에서 찾다니, 아무렇게나 건드려봐도 될 관점은 아니지 않은가?

 

벽돌처럼 두터운 지면을 가득 채운 논지 전개를 따라가 보고선, 이 두 단어가 결합했을 때 생성되는 의미가 얼마나 충실하게 저자의 시의적절한 주장을 압축해 낼 수 있는지에 감탄했다. 화석 자본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작금의 사회경제구조를 설명하는 한 가지 얼개를 획득하는 것이다. 화석 자본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그 사회경제구조에 화석 연료가 어떻게 필수 불가결한 내재적 요소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지를 간파하는 것이다. 또한, 화석 자본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그 결속을 추동해 온 혐의자를 검거할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이 죄인에게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할 수 있을까? 뚜렷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도 그러한 용단이 가능할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1. 화석 경제의 시대


 

화석 자본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는, 지구온난화의 주된 원인으로 제시되는 화석 경제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일어난다. 파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멈출 방안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것은 애초에 이 과정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는지를 정확히 파악한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저자는 화석 경제가 탄생하던 순간을 천착한다. 단순히 말해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을까?

 

화석 경제란 “점차 더 많은 화석연료를 소비하여 CO₂ 배출량을 지속해서 증가시키는 것을 전제로 자기지속하는 성장경제”라고 정의될 수 있다. 여기서 ‘자기지속하는 성장경제’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원리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 정말 단순하게 말해 보자면 현재의 경제 구조가 성장을 해야만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조건 지어졌다는 사실을 지시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은 이윤을 통해 더 큰 자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계산이 서야만, 그러한 조건에서만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 활동을 추동한다. 따라서 자본은 필연적으로 반드시 더 큰 자본으로 성장하며-성장해야만 한다.

 

이 설명에 ‘점차 더 많은 화석연료 소비’를 추가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지속 성장이 오로지 화석연료 소비량을 점점 더 늘림으로써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석 소비의 끊임없는 증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필요조건이다. 화석 소비를 줄이거나, 혹은 유지하면서 경제가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화석 소비를 줄이면서 경제가 축소하는 것은 지금의 사회경제구조 내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화석 경제는 하나의 총체로 이루어진 역사적 실체”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하나의 총체’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이 화석 경제의 원리에 의해 구축된 실재하는 현실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하게 말해 보자면 현대의 세상에서 모든 행위는 화석 소비에 가담하도록 조건 지어졌고 임의로 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역사적 실체’로, 인간의 삶이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된 것은 지극히 현대에 특수한 일이다. 우리에겐 현대의 세상이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로 받아들여지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이 같은 삶이 자연스러웠던 적 없고 따라서 지금과 같은 미래의 세상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저자는 지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삶의 형태를 버릴 수 있고, 버려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2. 화석 에너지는 자본의 필연적인 선택


 

현대의 사회경제구조가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을 들여다볼 때 이 주장은 힘을 얻는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 그중에서도 혁명을 주도한 면직업계. 어떤 동인이 면직업계를 화석 연료를 연소하는 증기력으로 이끌었는가? 기존에 주류를 이루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증기력 이전 면직업계의 주된 동력, 수차가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인 가격 상승이 있었고(리카도-맬서스식 패러다임), 기술적으로 더 우월한 증기력이 확산하고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를 성립시켰다(기술결정론).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인류 전체가 전진해 온 과정의 결과다(인류세 서사). 그러나 실은 증기력으로의 전환 시점에 수력은 여전히 면직업의 수요를 웃도는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었고, 증기력보다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훨씬 저렴했으며, 증기력의 도입은 자본이 노동에 대한 우위를 공고히 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이었지 인류의 선택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작업장 현장에서 벌어졌던 관리자와 작업자 사이의 투쟁, 기계 도입을 위한 열렬한 선전과 이에 반대하는 완강한 저항, 특정한 기술적 가능성에 대한 무관심과 다른 기술로 한몫 잡아 보려던 욕망”을 들여다봤을 때 증기력으로의 전환을 이끈 동인을 포착할 수 있다. “관계들의 집합이자 최대의 잉여가치가 생산될 수 있는 추상적 공간과 시간 속에 인간과 인간 외의 자연을 새로이 정렬시킴으로써 진행되는 끝없는 확장의 과정”인 자본주의적 성장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으며, 머나먼 과거의 유산일 뿐 현재 흐르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화석 연료의 특성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증기력이 선택된 것이다.

 

수많을 ‘관계들의 집합’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관계들은 자본가 대 노동자, 그리고 자본가 대 자본가의 관계이다. 이 관계에서 권력을 점하는 것을 증기력이 가능케 했다. 유량이 많고 낙차가 큰 자연적인 지형, 즉 자연성에 기반한 ‘절대적 공간’을 찾아 널리 분산해야 하는 수력과는 달리 증기력은 어디든 자본이 원하는 곳에 터전을, ‘추상적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자본이 원하는 ‘추상적 공간’의 특성은 “노동자의 집적, 원료, 장치와 생계수단의 집중이다”. 한 점으로 집중되는 도시에는 무엇보다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수가 넘치며, 기계에 종속된 엄격한 공장 노동 환경에 순응하는 저렴한 임금노동 인력이 존재한다. 시장과 기술적 집적, 기반시설 등 도시의 매력은 다양했지만, 무엇보다 처우 개선에 대한 노동자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을 정도로 과잉한 노동력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생산을 가져다 놓을 수 있게 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화석 에너지였다.

 

또한 자연적인 시간에 따라 과제가 수행될 수 있는 적합한 때에 일했던, 즉 ‘구체적 시간’을 따라 노동했던 과거와 달리 임금 노동자는 자본가가 통제하는 출근 시간부터 퇴근 시간까지의 시간의 단위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한의 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공장법에 의해 제한된 이 ‘추상적 시간’의 절대량은 날씨 등의 영향에 의해 결정되는 유속에 따라 노동해야 하는 수력에 엄청난 제약으로 다가왔다. 반면 화석 에너지는 주어진 시간 안에 얼마든지 노동의 속도를 증대시키기 위해 더 많이 투입될 수 있었고 외부 요인에 의해 중단될 걱정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언제나 경쟁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수력과 달리 공공성을 띠지 않고 얼마든지 사적으로 전용할 수 있는 화석 에너지를 선택했다. 시장에 의존하는 한 자본가들은 각자 “자기가 생산하는 제품의 원가를 낮출 수 있는 개선된 방안을 찾기 위해 상시적으로 경계 태세에 돌입하도록 강제”된다. 그런데 수력은 자연에서 분리될 수 없는 원천을 반드시 공동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고, 자본가가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상호의 이해를 고려해야만 하며 독단적으로 동력을 통제할 수 없게 하는 불편한 상황을 야기했다. 동력 수요가 급증한 상황에서 나온 대규모 저수지라는 방안은 충분히 합리적이었지만, “사적인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자들의 비합리성”은 상호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3. 출구가 보이지 않는 화석 경제


 

저자는 더 나아가 우리가 기후 위기의 곤경에 빠지게 만든 이 동인,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추구가 1) 세계화를 통해 날개를 달았으며, 2) 화석 연료를 위한 초중량급 생산수단과 교통수단, 즉 고가의 고정자본에 매몰된 엄청난 비용을 회수해야 한다는 관성을 만들어냈고, 3) 현대인을 오로지 화석 경제의 소비하는 주체로, 화석 연료를 “물질적으로 취하지 않고서는 거의 어떠한 주체도 형성될 수 없”게 구성해 냄으로써 이제는 이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힌다.

 

특히 1)의 세계화의 경우 화석 에너지 소비를 더욱 극단적으로 가속했다. 자본이 “저렴하고 규율을 잘 따르는 노동력이 있는 위치”로 세계적으로 이동하면서 첫째, 초국적기업을 유치하고 싶은 국가들이 앞다투어 화석 에너지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기반시설을 건설하여 화석 경제의 ‘팽창 효과’가 일어난다. 둘째, 이러한 이동은 일정 수준 개발이 완료되는 전환점 이후 소득과 탄소 효율이 정방향으로 비례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탄소 집약도가 높은 국가로 산업이 계속해서 이전되는 ‘강도 효과’로 귀결된다. 마지막으로 셋째, 세계화된 생산은 원료, 상품, 관리자가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 체계의 확충이 필요하고 따라서 교통 부문에서의 CO₂ 배출이 증대되는 ‘통합 효과’를 일으킨다.

 

이 현재진행형의 배출 폭증 과정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관성에 끌려가고 있고, 화석 경제 바깥의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모른다.

 

 

 

4. 문이 없는 집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집을 무너뜨리자


 

저자는 화석 자본을 와해시키는 것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행동 강령의 철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 삶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건을 모두 내다 버리고, 새로운 사회경제구조를 발명해야 한다. 그것만이 이 급속하게 진행 중인 (그렇지만 개개인의 감각으로는 정말로 너무 늦기 전엔 임박한 사실로 체감하기 어려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멸 과정을 멈출 방법이라고 한다.

 

2010년대 중반에 이미 태양에너지와 풍력이 화석에너지보다 저렴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제시한 에너지 대체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군의 연구 중 가장 덜 낙관적인 것만 보아도 “2050년이 되면 전 세계의 경제 … 를 재생에너지로 얻은 전력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과업은 이미 개발된 기술만 가지고도 달성이 가능하다.”

 

문제는 재생에너지 기술이 발전하고 보편화될수록 에너지의 원천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자연력”이기에 재생에너지의 가격은 반드시 하락하고, 이것은 결국 재생에너지 산업이 발전할수록 이윤은 하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투자가 지속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또한 재생에너지는 ‘추상적 시공간’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요구에 반한다. 재생에너지의 ‘구체적 시공간성’을 극복할 가능성이 보이는 방안 역시 실은 이미 존재하긴 한다. 집중식 태양열 발전소와 해상풍력발전단지 등의 기술과 여러 장소의 전원을 통합한 ‘초광역 전력망’을 통해 재생에너지가 가장 풍부한 장소에서 에너지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때에 전력을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은 고도의 계획과 협조가 필요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 투자자들의 경쟁은 국가 주도의 외교와 서로 배치될 수 있다.”

 

결국 저자는 계획경제의 필요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공적 권력만이 “이윤 외의 다른 목표를 가질 수 있으며 자본처럼 항상 확장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지 않”고, 에너지 전환을 위한 장기 계획에 투자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화석연료 사용을 직접 억제”하지 않고서는 실질적인 전환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에, 더욱 공적 권력의 깊숙한 개입이 필요하다. 제시된 감축 시나리오 연구들에선 무려 자본의 와해를 통한 ‘계획적인 경기 후퇴’, ‘전시 동원’과 같은 국가 체제를 촉구한다.

 

*

 

하지만 신자유주의 질서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선 그 극단적인 전도가 실현된 세상이 도무지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상상하고자 애써도 이러한데, 심지어 제대로 된 논의의 시작점에 서려는 시도조차 언제나 실패만 거듭하고 있다. 종말이 임박한 불가역의 순간까지 태연히 지속되는 ‘평시 활동’ 이외의 미래는 어떻게 해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다만 나는 단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도 하지 않는가. 아무리 그 책이 풍부한 학술적 탐구에 근거해 서술되었다 해도, 이렇게 사회의 근간에 저주를 퍼붓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선 더 뚜렷한 확신이 필요할 것이다. 기후 위기를 해결할, 좀 더 실현 가능해 보이는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아직은, 판단을 유보한다. 혹시나 지금 이 글을 읽고 위기감이 엄습한 사람, 혹은 반대로 말도 안 되는 낭설이라고 일축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어느 쪽이든 부디 결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기후 위기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지독히도 충실한 설명에 귀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너무 늦지 않길 바라며 대화를 시작하자.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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