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싱그러운 계절에 유난히 싱그러운 영화를 봤다.
푹푹 찌는 한여름이 주는 왠지 모를 무료함도 좋지만, 역시 초여름의 적당한 공기가 마음을 들뜨게 하는 데에는 최고지. 오늘은 정말 슬프지 않은 이야기를 보고 싶은데, 생각하며 페이지를 뒤적거리다 눈에 띄는 이미지를 발견했다.
영화의 포스터엔 햇볕을 받은 녹색 잎과 그리고 어딘가를 부루퉁히 응시하고 있는 말간 얼굴의 두 청소년의 이미지 위로 ‘꼭 뭘 해야돼요?’라는 카피가 쓰여 있었다. 웃음이 날 만큼 어울리는 구성이었다. 게다가 보희와 녹양이라니, 이 낯설고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제발 슬픈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하며.
보희와 녹양은 같은 날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단짝 친구다.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보희와는 달리 녹양은 어디서나 당당하고 거침없다. 보희는 어릴 적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고, 녹양은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없이 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보희는 자꾸 아버지의 존재가 궁금하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 같다는 의문에서 시작된 보희와 녹양의 ‘아빠 찾기’ 여정은 영화의 전반적인 서사를 이끌어 간다.
<보희와 녹양>은 얄밉다. 여기서 얄밉다는 건 명료하지 않다는 의미와도 같다. 이는 보희와 녹양이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보희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이복누나(라고 생각했던) 나미를 찾아간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이복 누나가 아니라 사촌 누나였다. 게다가 ‘이수민’인줄 알았던 아버지의 이름은 사실 ‘이수인’이었고, 추적의 실마리를 찾아줄 것 같던 사촌 누나는 돌연 해외로 출장을 가버린다. 이렇듯 영화는 무언가 해결될 듯할 순간 자꾸 샛길로 빠진다.
보희는 남자아이지만 남자아이 같지 않고, 녹양은 여자아이지만 여자아이 같지 않다. 이름부터가 명백한 반전이다. 으레 성장담이 자기 안의 문제를 인식한 상태에서 외부와의 충돌로 인해 그 갈등을 심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듯, <보희와 녹양>의 성장담도 보편적인 관념과는 조금씩 다른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세워둔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투쟁하지 않는다. 상처받으면서도 맞서 싸우지를 않는다. 우울하다가도 같이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난다. 결핍이 있다면 있는 대로, 없다면 없는 대로. 외부가 정한 규격과 그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어린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 ‘그냥’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성장은 계속된다.
하나 가정을 해보자. 어떤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누군가에 의해 꽁꽁 숨겨져 있다. 그럼 그 비밀은 그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점점 거대하게 그 몸집을 키우게 된다.
보희의 아버지도 그런 존재다. 보희가 결연한 얼굴로 아버지가 살아있는 것 같다고 말했던 순간, ‘아빠 찾기’의 과정에서 실마리를 점점 찾아가던 순간, 결국 아버지를 찾고 그에게 다가가기 직전의 순간. 그 때의 보희의 얼굴엔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한다. 어머니에 의해 숨겨진 어떤 '수상한 비밀'이 자기 안의 이름 모를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또는 파멸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섣부르고 천진한 걱정과 기대가 그곳에 있다.
그리고 모든 비밀이 밝혀진 후의 보희의 얼굴을 보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또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사실을 마주하고 난 뒤의 보희의 얼굴엔 당황과 혼란, 그리고 깨달음이 있다. 비밀의 실체를 비로소 마주한 보희는자기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과 화해하게 된다. 그렇게 아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목격한 소년은 모든 '어긋남'을 인정하며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가뿐하게 강 위를 수영하듯.
이들의 이야기는 슬픔마저 따뜻하다. 자고로 햇살 아래의 슬픔이 어둠 안의 슬픔보다 사무치는 법인데, 영화는 여름의 뜨거운 볕 아래의 소년 소녀가 자신의 슬픔을 만끽하는 것을 놔두지 않는다. 서로가 있기에 절대로 동굴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은 서로를 자꾸 구원한다. 그것이 구원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우울하고 슬프다가도 자꾸 피식피식 웃게 되는, 곁의 존재가 있음에 가능한 푸르른 성장이다.
이토록 다정하고 청량한, 동시에 자유로운 성장담이 있다. 그 공기마저 산뜻한 초여름의 시작과 어울리는 영화, <보희와 녹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