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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우울과 피곤, 선잠의 세계

당신은 나의 염세가 궁금하다 했던가

by 김인규 에디터
2024.05.12 13:58



나는 피곤과 우울을 구별하지 못한다. 나는 지금 피곤하다. 눈이 감긴다. 다시 말해 우울하다. 커피와 운동이 주는 각성을 빌려 몸은 자는데 정신만 붕 떠있다. 아니 반대인가. 정신은 이미 쇠락하여 언덕 너머 뒤안길에 남겨진 채 삶은 흐르는데 젊은 몸은 방황하며 헤메인다. 몸과 정신의 흐릿해진 경계. 흩뿌려진 안개만큼이나 모호하다. 피곤이 먼저인가 우울이 먼저인가.


가능성의 꽃봉오리가 피어나기도 전에 저물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야 할텐데, 꽃은 피어나야 할텐데. 나는 해를 향해 기지개 피우기보다는 어둠에 가려져 고개를 떨군다. 행위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가, 나의 존재가 일생에 걸쳐 행위하도록 이끄는가. 나는 결정되고 매듭지어진 존재인가, 끊임없고 지난한 삶의 과정을 통해 증명해야하는 존재인가. 나는 무엇이고 지나온 삶의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별 볼일 없는 삶을 뒹구는 소리가 들린다. 치덕치덕 으깨지고 뭉개지는 삶.


그곳에서 나는 개별된 존재로 구분되지 않고 타인의 취향과 사상과 소음에 길들여져 목에 밧줄이 메인 짐승처럼 그렁한 눈망울을 하고 선다. 그마저도 감기고야 말 커다란 눈이 총기를 잃고 흐릿해져간다. 희뿌연 검은자와 탁한 흰자가 경계를 잃고 뒤엉킨다. 나는 피곤하다. 나는 쉬고싶다. 반복되는 아침의 피로를 박차고 일어날 다리가 없다. 울어대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싶지만 손이 없다. 사지가 절단된 몸뚱아리는 귀를 막을수조차 없다. 쉬이 잠들지도 못하고, 일어나 살지도 못하고 방 한구석에 허물처럼 벗어놓은 구겨진 바지처럼 누워있다. 무방비로 방치된 나의 삶. 


나는 몸에 갇혀 도처에서 쿵쿵거리는 진동과 웅성거리는 소음에 둘러쌓여 삶이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나는 팔다리가 잘린 채로 덜컹이는 교통수단에 실려 움직인다. 흔들리고 깨어지고 부딪히는 삶.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덜컹거림이 있다. 그러나 그 끝에 나는 그것을 손에 쥐고 돌아왔는가. 고작 지갑과 핸드폰만을 잊을새라 움켜쥐고 넘치는 졸음의 범람에 기댄다. 그러나 한가로운 벤치에 앉아 모든 것을 손에 쥔 인간이 있지. 나는 오늘 그것을 바라보다 오는 길이다. 내가 평생에 걸쳐 원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얻어버린 인간을. 


인생이 나에게 거칠고 흙먼지로 뒤덮힌 산길이었다면 그에게는 미끄럼틀이었겠지. 겨울철 포대자루를 끌고 눈길 위를 미끄러져 내려오듯 시원하고 매끈하게 내리지르는 감각, 그 나름의 힘든 일도 있었을 것이나 그저 주어진대로 미끄러져오면 되는 인생 말이다. 그에 반해 타고나면 피투성이가 되어버리는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절벽, 벌레 가득한 진흙더미, 나의 미끄럼틀. 피부 밖으로 날카롭게 튀어나온 골절된 뼈가 흔드는 손을 대신한다. 당신이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건네는 인사에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 역시 안녕이라고, 그러나 잔뜩 낀 축축한 이끼와 조화로 장식된 뼛조각을 당신 얼굴 앞에 들이밀면서, 귓가를 웅웅대는 날벌레 몇마리가 대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실존이다. 떼놓을 수 없고 분리할 수 없이 내 존재에 따라붙는 나만의 것이다. 내가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 나의 삶. 그간 세상이 나에게 주었던 것들. 그로부터 좋은 것을 피워내기 이전의 축축한 거름 덩어리. 당신에게는 포장하거나 가공하지 않아도 좋을 무해함이 있지, 애써 피워올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사랑스러움이 있지. 나에게는 사고를 섞어 반죽하지 않으면 형태가 잡히지 않는 혼란스러움이 있다. 나에게는 오랜 인내로 구워내지 않으면 남들에게 들이밀 수 없는 축축한 반죽 덩어리가 있다.


당신들은 나의 염세를 궁금하다 했던가. 이것은 솔직한 방식으로 포장된 나의 무엇이다. 나의 경멸, 나의 우울, 나의 자기혐오, 그리고 나의 그리움의 실체. 이제 나는 낱낱이 뜯어놓아 해부하며 전시한다. 이것은 나의 허파, 이것은 나의 간장, 이것은 나의 썩어빠진 간과 더이상 피를 돌리지 못하는 차가운 심장이라고. 잔인한가? 아니, 진정 잔인한 것은 나의 팔다리를 떼놓은 삶이었겠지. 당신은 나의 삶을 결단코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잣대로 납작하게 찍어내어 나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지도 마라. 우리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일 뿐이다. 나 역시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전제는 내가 맥락없이 눈물을 삼키는 바로 그 이유이며, 당신 앞에서 입을 다물고 침묵하기를 선택하는 까닭이고, 끝없이 고뇌하고 우울에 빠져드는 나의 심연이다.


분화되어버린 삶. 오해로 미끄러져내리는 이해라는 착각과 피상적인 위로와 하나마나한 말들이 공기를 떠돈다. 악취가 난다. 그러니 당신이 그냥 입을 다물어주었으면. 당신의 모든 소리와 멀어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나는 갈구한다. 아주 좁은 방에 갇혀 손톱이 빠져라 긁어대는 짐승처럼, 나는 내면의 작은 방에서 피흘리는 인간이다. 바람빠진 풍선처럼 푸쉬시- 구멍이 난 페르소나를 가진 인간이다. 나의 풍선이 기괴한 얼굴로 찌그러지며 당신 앞에 내려앉을 때 스쳐간 표정들을 나는 잊지 않는다.


어느 글에서 그리워하는 순간을 떠올리며, 우리가 이미 멀어지고 서로 다른 삶을 살지라도 사랑의 순간에 서로에게 건넸던 진심만큼은 진짜라고 적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겪은 나의 삶의 진실 역시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눈을 가린다 한들 존재가 사라지지 않듯이. 당신이 남몰래 나를 찢어죽여도 흩뿌려진 핏방울을 쉽게 지워낼 수 없듯이. 대상없는 분노와 그리움, 억지로 피워올린 희망, 그로인해 비롯되는 역겨움과 자기혐오. 동경해 마지않는 당신이 될 수 없는 설움. 불만족과 피로와 피곤. 나는 자꾸만 집에 가고싶다. 거실에 누워 집을 찾으며 되뇌이는 혼잣말을 들은 이들은 묻는다. 네 집이 어디냐고. 대답한다. 나도 모른다고. 


내가 가고싶은 곳은 어디인지, 가야하는 곳은 어디인지, 내가 있어도 되는 곳은 어디인지 나는 가리워진 눈으로 헤메인다. 무의미의 지옥이 나를 가르킨다. 시지프스의 손가락이 나를 일컫는다. 끝없는 반복과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다가오지 않을 일상들이 저 멀리서 비웃듯이 나를 지목한다. 나를 변호하는 것은 모호하게 미끄러지는 선잠뿐이다. 말끔해진 정신과 충분한 휴식을 취한 몸뚱이가 아니라 휴식을 감각하는 얕은 자각몽의 세상만이 나를 위로한다. 나는 끊임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인가,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가 나인가. 꿈꾸는 나비가 먼저인가, 나비의 꿈이 먼저인가. 나의 존재는 흩어지는 틈바구니 속 뭉쳐진 작은 먼지인가. 


피곤이 먼저인가 우울이 먼저인가. 둘 다인가. 피곤은 해소될 수 없는데 어떡하지. 우울은 해결될 수 없는데 어떡하지. 꿀꺽, 나는 알약을 삼킨다. 파란색이었는지 빨간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시절 뒷간에서 얼굴없는 긴 머리가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흔들었던 것이 무슨 색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몽상이지. 기억은 어디선가 읽은 것처럼 모호하다. 그리하여 기억의 연속성으로 존재를 규정하는 인간은 경계 밖으로 풀려난다. 선잠 속을 떠돌며 현실과 그 이외 세계에 팔다리를 걸쳐놓는다. 사분면에 걸쳐진 팔다리를 누군가 잡아당긴다. 자신의 세계의 일부가 될 것을 재촉한다. 어느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팔다리가 모조리 뜯겨 낡아빠진 몸뚱아리만 남아버린 삶.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며 추락한 신체는 이제 어느쪽에 더 가까워져있나, 경계없는 선의 경계를 빤히 바라본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최근에는 원형적 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나의 무력감과 나의 슬픔 나의 분노, 나의 사랑과 그리움과 그 모든것을 담은 최초의 순간. 재생 반복되며 일련의 사건들에서 내가 재확인하고 있는 내면 깊은 곳의 기억과 감각. 또렷이 기억하고있고, 완전히 지워버린 몇개의 장면들. 환상인지 꿈인지 내가 겪은것인지 읽은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원형들. 차마 여기 적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나도 무엇인지 모르기에 말해질 수 없는 진실들. 존재는 현상의 틈바구니에서 부유한다. 


나는 뜯다말고 대충 욱여넣어 다시 포장해버린 택배 선물상자와 같다. 이제는 누구도 파악할 수 없다. 뒤틀린 배치와 찌그러진 형체와 뒤섞인 불순물들이 곱게 닫힌 문 틈 사이로 엿보인다. 바퀴와 쥐가 갉아먹고 번식한 새끼들이 튀어나오고 배설물이 배어나온다. 역겨운 것들의 틈새에서 선물일 수 있었던 원형들을 골라모은다. 이름 붙인다. 나는 쓴다. 수신 불명. 반송되어 돌아오는 우편도 있고 과거로부터 미래에게 전해지는 편지가 있다. 강남 한복판의 전단지처럼, 무차별하게 살포되는 삐라처럼 천지를 팔락거리며 휘젓다 누구의 눈길이 닿기도 한다.


 쓴다는 건 이토록 처절한 것. 최근 어느 밤, 하루를 꼬박 넘긴 어느 대화에서 나는 살기 위해 쓴다고 말했다. 쓰지않고 삶을 견디는 법을 나는 모른다고. 내가 쓰는 글은 화분속에 담긴 일종의 조화(플라스틱 꽃)같다. 화분 속 지렁이처럼 살아 꿈틀대는 몸뚱아리와 미생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의 거시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미시세계의 사건들. 분자 단위의 장면들. 발아하지 못한 아름다운 꽃송이들은 씨앗의 형태로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틀어박혀 숨죽이고 있다. 빠르고 쉬운 방식으로, 아니 어쩌면 나에게는 유일한 방식으로 그저 쌓아 올리는 것은 내가 피워내고 싶었던 모습의, 그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 주었다 뺏어간, 내가 결국에 스스로에게 쥐어주고야 말 아주 아름다운 꽃 한 송이의 모습을 닮은 플라스틱 조화. 그럴듯한 향기를 풍기며 흩날리는 비누향 장미꽃잎 몇 장으로 화분을 장식한다.

 

그렇다면 내가 피워낸 조화는 가짜인가? 아니, 그것도 나의 일부다. 내가 박아넣어 나로 편입시킨 나의 세계이다. 나라는 존재의 경계는 어디인가. 어디까지 나를 구획해야 할까. 내가 꾸며낸 나의 정원을 구성하는 건 얼룩덜룩 기워붙인 천쪼가리, 잡동사니를 긁어모은 콜라주, 좋아보이는 것들만 골라모아 기괴해진 키메라.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다. 내 안에는 길들일 수 없는 생물이 있고, 여전히 누르면 피가 왈칵 배어나오는 절상이 있고, 무해한 겉껍질이 있으며, 작은 마찰에도 쉽게 쓸리고 부어오르는 진피가 있고, 부숴지지 않는 단단한 씨앗이 있고, 결석처럼 돌아다니며 고통을 주는 날카로운 결정들이 있고, 석류알처럼 알알이 피어나는 사랑이 있다. 울타리를 허물고 나라는 인간의 경계를 모호히 무한하게 확장하기.


나는 생각들이 백지 위에서 위험하게 뛰어놀고 소리지르고, 울고 웃는 것들이 잠잠해져 자리에 앉으면, 배를 열어 해부한다. 아름다운 것들은 포르말린 용액에 넣어 보관한다. 더러운 것들은 언어로 이루어진 거름망에 걸러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자음과 모음을 씨줄삼고 날줄삼아 그물지어 골라낸다. 내가 되고싶은 것들만 골라 편입시킨다. 나는 그렇게 내가 된다. 당신의 꽃밭에는 빛나고 향기로운 것들이 많아, 벌과 나비가 넘쳐난다. 나도 그저 한 마리 나비였나. 나는 동경한다. 물론 씨앗이 아닌 꽃으로 태어나는 것이 없음을 나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관심 갖는 건 당신이 내민 꽃이 아니라 그 꽃이 사는 축축한 대지. 순수가 아니라 순수를 피워내는 최초의 원형. 위험한 혼잣말을 감싸안은 포장지이다. 


 괴롭다. 나는 내가 살수도 있었을 어느 삶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다. 나는 나의 삶을 굴릴수밖에. 내 삶은 손잡이 없는 뜨거운 냄비같은 것. 손잡이를 쥔 당신들은 그저 들고 옮기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는 익어버리고 녹아내린 손을 붙잡고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 맞잡은 당신의 손이 시원하고 쾌적해서, 형체가 무너져내리는 손모양을 당신이 깍지끼고 꽉 붙잡아주어서 나는 자꾸만 떠올린다. 당신의 모양대로 자국이 남아버린 흐믈거리는 슬라임을 애써 주워담는다. 고양이가 헤어볼을 토하듯이 한글로 토해낸 글을 젤리같은 손으로 이리저리 굴려본다.


나는 골라모은 천쪼가리를 기워 당신과 내가 겨울을 보낼 스웨터를 지어주고야 말겠다. 당신에게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주고야 말겠다. 내가 꾸며낸 아름다운 정원에 초대해 당신을 웃게 할 것이다. 그러니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면, 당신이 그것을 보고 웃을 수 있다면, 내가 피워올린 것이든 어디선가 옮겨심은 것이든 단단한 조화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것들은 여전한 삶의 고통을 적어도 조금은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더 좋을거야’의 안쪽에는 죽고싶다는 혼잣말이 있었다. ‘어쨌든 사랑’의 뒤에는 슬프다는 중얼거림이 있었다. ‘사랑으로 살자’는 다짐 뒤에는 생략된 X발이라는 거센 다짐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피워낸 수많은 글에는 X같다는 현실 인식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빈번한 절망과 잔잔한 슬픔이 도사리는 세계. 그러므로 그것들은 숨기어내거나 위험해서 검열한 것이 아니라, 너무 당연한 전제라서 생략한 것들에 불과하다.  


죽고싶다고 종종 혼잘말로 되뇌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힘을 가진다는데, 진짜 죽어버릴새라 수정하는 발화. 죽고싶은게 아니라 잘 살고싶은 거겠지. 간절한 거겠지. 바라는 거겠지. 그러나 이어지는 혼잣말. 다시 수정한다. 그만 하고싶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내 삶으로부터의 탈출, 내 삶에서 먼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끈질기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나에게서 끊어지고 싶었다. 나는 내 존재를 잃어버리고 싶다. 선잠의 세계. 모호한 기억의 경계와 흐려지는 존재의 구획. 흩어지는 연속성과 달콤한 휴식. 나는 회복이 아니라 휴식을 원한다. 쉬지 않고 잡을 수 있는 힘이 아니라 흩어지는 모래알 사이로 힘이 풀려버린 손아귀를 원한다. 남은 것은 고귀한 추락. 놓아버리면 남는 것은 고작 그것뿐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잠시간의 자유. 귓가를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과 넘치는 가속도에 세상이 나를 스쳐가는 감각. 


 그러나 끝내 꿈 속 세계는 나를 추방한다. 팔다리가 잘린 채 시체처럼 누운 내 귓가에 들려오는 꼬끼오- 울어대는 닭과 지저귀는 새들의 역겨운 노랫소리. 어느 세계에도 정착할 수 없는 존재의 부유. 존재의 필연, 존재의 심연. 망각 저 너머로 휘발되는 아득한 기억들. 건너편 세계의 그는 이제 해방되었나? 모든 숙제와 비밀들을 이쪽으로 이관한 채 평화롭게 흩어져버렸나. 


나는 당신에게 아름다운 것들을 주고싶다. 그러나 동시에 그냥 잠들고 싶다. 눕고싶다. 선잠의 세계에 살고싶다. 다시 한 번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들이미는 손. 아아 무슨 색이 현실이고 무슨 색이 꿈이었더라. 흐려지는 경계, 흩어지는 기억. 나도 몰라. 잠시만 기다려줘. 선택을 조금만 유보하게 해줘. 나는 깨어나고 싶지도 않고 영영 꿈속에 갇히기도 싫다. 그저 흩어지고 싶다. 꿈과 현실을 모두 감지하고 현실의 몸과 너머의 정신으로 감각하는 선잠에 세계에 흘러들고 싶다. 


 아아, 피곤하다. 아니 우울한 것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만 침대에 누워야겠다. 잠에 들어야겠다. 그러나 영영 잠들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되면 해는 뜨고, 창문 너머로 햇살은 들어온다. 설령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또 몇시간이 흘러 언제일지 모를 한낮이 되더라도, 아주 늦은 늦잠이 되더라도, 나는 다시 눈을 뜰 것이다.. 아니 그저 흩어지려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다. 그러나 손이 없다. 제발 나를 깨우지 말아줘. 나를 잊어줘. 사라져줘. 아침이면 울던 닭이 어디 갔더라. 숨어있다가 내가 잠든 사이 내 눈을 파먹으려나. 아니 내가 닭이었나. 나는 누구였더라.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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