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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당신은 자신이 쓸모없어졌다는 사실을, 아니 실은 처음부터 별거 아닌 존재였다는 것을 어느날 깨닫게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때 기대주였을지는 몰라도 그 가능성은 이미 모두 사그라들였고, 대단한 미래를 꿈꾸지만 실은 말단 직원에 불과한 삶을 거짓 없이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지 묻는 거다. 또한 나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세계는 불황으로 신체는 노화로 접어들며, 자신이 자초한 과거의 결과물들이 죄책감으로 끊임없이 따라붙을 때도 흔들림 없이 현실을 마주할 수 있을까.

 

예컨대 친구가 갑자기 찍은 내 사진을 보면서 너무 이상하게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 모두가 입을 모아 잘 나왔다고 말할 때, 반문해보지만 실제와 똑같다는 답이 돌아올 때의 그 당혹스러움. 당신은 그 카메라 렌즈와 어색하고 낯선 얼굴로 서 있는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느냐는 거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합리화하는 존재에 가깝다. 현실은 똑바로 눈 뜨고 보기에 너무도 고통스럽다. 여기 합리화와 인지부조화에 관한 한 실험이 있다. 1957년 레온 페스팅거와 메릴 칼스미스가 고안한 인지 부조화 실험은 이렇게 진행된다.

 

이 실험에서 그들은 한 학생에게 지루한 과제를 반복하는 일을 맡긴 후 그 방을 나가면서 다음 참가자에게 그 일이 재밌었다고 말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그 댓가로 절반의 학생에게는 20달러를 주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1달러만 지급했다. 그러자 20달러를 받은 학생들에 비해 1달러를 받은 참가자들은 실제로 그 행위를 더 재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인지부조화와 정당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이 실험은 이렇게 해석된다. 비교적 높은 보상을 받은 학생들은 자신의 거짓말을 그 반대급부에 기대 정당화할 수 있었지만, 적은 금액을 받은 참가자들은 그 보상이 거짓말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말에 대한 간극을 줄이고자 스스로를 수정했다는 것이다.

 

그 삶이 비루하고 현실이 비참한 것일수록 그리고 그 보상이 터무니없을수록 우리는 더 쉽게 스스로를 왜곡하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갑자기 찍힌 사진 속 내가 가짜라고 부정하거나 부끄러워 외면할 때도 모두가 보는 현실의 내 모습은 그것과 같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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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은 자꾸만 혼잣말을 한다. 그에게는 자꾸만 젊은 시절의 한 장면들이 찾아와 현실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에게 찾아와 “정글은 어둡지만 다이아몬드로 가득 차 있다”며 부와 성공을 말하는 인물이자 그의 큰형 ‘벤 로먼’과 만나는 장면도 역시 그의 상상일 뿐이다. 그는 현실이 아니라 과거와 헛된 희망에 매여 산다.

 

상상 속에 벤 로먼이 찾아오는 날에 윌리가 그에게 하는 말은 잠시 본인과 이야기를 좀 나누자는 것이다. 그간 너무나 외로웠다며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다. 그에게는 사실 의지할 곳이 하나라도 필요했다. 그는 너무도 외로웠던 거다.

 

지난 30년간 일해온 직장과 세일즈맨으로서의 자부심은 현재 그의 삶의 그 무엇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는 이제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고, 돈이 없어 냉장고 수리비와 보험료를 낼 수 없고, 잦은 사고와 노쇠한 몸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없다. 자신의 잘못으로 느껴지는 큰아들의 방황까지. 그는 현실의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어 과거만을 떠올리고 그 속에 갇혀서 살아간다. 그가 눈을 뜨면 마주봐야 하는 현실은 이렇다.

 

미식축구 유망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첫째 비프 로먼은 어린 시절 수학 낙제로 졸업이 유예되며 팀 자리를 약속받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 한다. 그후로 이런 저런 일을 전전하지만 어느 곳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어린시절 도벽을 고치지 못해 농장에서 미래도 없이 얼마 안 되는 주급을 받으며 산다. 그의 방황은 어린 시절 우연히 봤던 아버지 윌리 로먼의 외도와 관계돼 있다.

 

본인 없이는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말하던 윌리 로먼은 사실 기본급도 없이 계약 성사에 따른 커미션만 받으며 일하고 있었고, 더 이상 운전도 할 수 없어 매번 출장을 나가야 하는 외근직 대신 뉴욕 내근직 자리를 요구하지만 30년 넘게 다닌 회사에서 거절당해 화를 내다 결국 해고된다. 그리고 그는 아들의 도벽마저도 용인하며 감싸키운 과거와 외도로 인해 아들의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둘째 아들인 해피 로먼은 자신이 현재 회사의 이인자로 중책을 맡고 있다고 떠들고 다니지만 실은 말단 직원에 불과하다. 반면 어린 시절 윌리와 해피를 따라다니던 범생이 버나드는 법조인이 돼 성공한 삶을 산다. 그들이 과거에 사로잡혀 눈을 돌리던 과거는 사실 이런 모습이다.

 

비프 로먼은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새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아는 사업가에게 돈을 빌리러 갔지만, 자신이 그 사람 밑에서 일했었다고 생각한 건 실은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게다가 비프 로먼은 사업가의 만년필까지 훔쳐나온다. 그는 이제 우리가 현실을 똑바로 봐야한다고 가족들 앞에서 울분을 토하지만 그 누구도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그마저도 결국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술집에 버려두고 여자와 술이나 퍼마시다 집에 들어온다.

 

그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가족과 연을 끊고 다시 떠나려하지만 마지막 인사를 나누다 또다시 아버지와 언성을 높이고 만다. 그런데 그때 그 싸움에서 아버지 윌리가 발견한 것은 뭐였을까. 아들이 여전히 자신을 신경쓰고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유망주로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촉망받는 기대주였던 자신의 아들, 그러나 자신이 도벽을 용인하며 잘못 키웠고 외도 장면을 들킴으로써 자신이 인생을 망쳐버린 아들이 여전히 자신을 신경쓰고 있었다는 것. 그는 그것으로 일종의 존재 증명을 느낀다.

 

이에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계획이었던 죽음을 택한다. 차를 몰고 사고를 내 그 보험금으로 아들이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는 자신의 생을 끝낸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상징적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 연극은 마주보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진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을 흔해빠진 교훈이나 달달한 쾌락 혹은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작품 끝에 남는 것은 손에 쥔 단단한 돌멩이 같은 진실과 신발에 덜그럭거리는 날카로운 가시 같은 불편함이다. 나는 그 결정화된 눈물같은 감정들이 기꺼워, 인터미션 15분 포함 190분 3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에도 공연 기간 내에 다시 한 번 공연장을 찾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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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은 2025년 1월 7일부터 오는 3월 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진행된다. 연극이 주는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힘이 이 작품에는 있다.

 

다음은 박주영 판사의 책 ‘어떤 양형 이유’에 등장하는 그의 한 판결문에 적힌 양형 이유의 한 부분이다. 작품을 보면서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이 문장을 남겨두면서 글을 닫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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