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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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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직장에서 외국인 친구와 언쟁이 있었다. 한국말만 능한 나와 한국말만 서툰 그 사이에 또박또박한 각국의 X발X끼야가 오갔다. 요는 서로 간 묵은 감정이었다. 


나의 업무는 외국인 친구에 업무지시였고, 외국인 친구의 업무는 나로부터 받은 지시수행이었다. 나날이 잘못과 지적이 오가고 반복됐다. 틈만 나면 뺀질대는 놈과 틈만 나면 트집 잡는 놈이 우리 둘의 관계였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그 친구가 하나하나 꼴 보기 싫어졌고, 그 친구도 아마 마찬가지였던 눈치다.


내가 그 친구를 싫어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일단 말이 참 많다. 얼마나 말이 많은지 서툰 한국말과 능한 모국어를 오가며 정말 쉴새 없이 떠든다.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주변 분위기까지 흐린다. 그들을 관리하고 통솔해야하는 나로서는 정말 골치 아픈 입이다. 휴대폰도 참 좋아한다. 모국의 환율과 비트코인의 시세. 친구들과의 SNS와 전화 통화.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은 근무 중 모국의 노래를 크게 재생하는 순간, 어처구니가 사라진다. 식사 중에는 참 쩝쩝댄다. 얼마나 쩝쩝대는지 두 테이블을 띄워 앉음에도 쩌렁쩌렁 잘만 들린다. 그뿐이랴, 열거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 친구는 정말 구제불능이다.


그날,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근무 중 노래 재생은 삼가해달라 이야기했다. 이번이 아마 열 번째쯤이나, 처음 말하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 친구도 웃으며 알겠다 했다.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2분쯤 지났나, 저 멀리 노랫소리가 들린다. 열한 번, 열두번 이야기해야지, 참자. 20분쯤 시간이 더 흘렀고 자리로 복귀했다. 그곳은 직장이 아닌 클럽이었다. 2 쯤이었던 노래 소리는 8, 9로 키워진 상태였고. 심지어는 그 노래를 반주 삼아 노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야, 이 X발X끼야.


본인 예상보다 내가 빠르게 복귀했다는 눈치였다. 무안해하던 눈치는 계속되는 욕설에 맞수가 시작됐다. 본인 행동보다 내 행동을 문제 삼는 것을 보니, 아마 나를 지나치게 깐깐한 관리자 격으로 생각했던 눈치였다. 도대체 왜 노래를 틀면 안 되는지. 왜 떠들면서 일하면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더 큰 쌍욕이 나올 법도 했으나, 그러다간 정말 주먹다짐이 오갈지도 모른다. 조목조목 이유를 열거해 줬다. 분해하는 눈치였지만 반박하지는 못했다.


퇴근 후 그 친구를 흡연실에서 다시 만났다. 날 보자마자 90도로 인사하며 사과했다. 내가 네 인사권을 쥐고 있으니 그러겠지 안 속아 인마. 확실하게 찍어 누를 생각으로 이야기하다가, 장초에서 꽁초가 된 그 친구의 담배를 보았다. 당신 얘기도 좀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한 단어와 문장들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한다는 결론이었다. 잘잘못을 떠나 각국의 미안합니다가 오갔다. 우리 둘은 서로 100프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좌우지간 서로 인정했다.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 적이 많다. 매번 느끼지만, 그 마음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스스로를 순백의 피해자로 설정하고 상대방을 천하의 파렴치한 가해자로 설정한다. 그 결과, 나의 모든 행동은 완전무결한 이고 당신의 모든 행동은 완전 X발X끼라는 어폐가 발생한다. 그 친구가 노래를 트는 것은 타당한 불만이었지만, 비트코인을 한다는 이유로 혀를 찼던 것과 식사 중 쩝쩝댄다는 불만은 타당하지 않았다. 노래 재생을 삼가해달라는 웃음은 타당했지만, 야, 이 X발X끼야는 타당하지 않았다. 구제불능이라 단정지었던 문장은 타당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너무 다양한 사람이 산다. 나와 같아야, 너와 같아야 친구가 되는 것이라는 유년 시절의 관성이 너무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든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인간관계를 양산한다. 그리고 괴로워한다. 그것참 무지한 일이다. 영화나 노래처럼 저마다 장르라는 것이 있는 것인데 말이다. 내 장르가 오컬트라 해서 코미디를 비웃을 필요도 없는 것이고. 내 장르가 힙합이라 해서 트로트를 촌스럽다 여길 당위도 없는 것이다.


다름을 배우고 틀림을 배우는 것만큼 견문을 넓히는 일이 없다. 나를 갉아먹었던 관계들이 결국,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든다. X발X끼여서들 고맙고, X발X끼여서 미안했다.


나의 장르는 무엇이고 너의 장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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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계속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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