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한 그루씩 피워내는 당돌한 상상 - 내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

글 입력 2024.03.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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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향유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경우 예술이 간직하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도굴하는 게 주된 목표인 것 같다. 사람이란 무릇 그렇다. 홀로 품은 생각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어이 타자에게 비추어봐야만 얻을 수 있는 안정감이 있다. 이는 반대로, 단 하나의 공감이 불온함에 대한 의심을 타당함으로 순식간에 변모시킬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수많은 불온함 중엔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꽤나 확고한 바람이기에 몇 달 전 을 써내기도 했다. 나의 근원일지 모르는 나무로의 귀환을, 그렇게 나무라는 삶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속도에 질려버렸다. 나무의 시간을 살고 싶었다.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의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바람이 다른 이도 꿈꾸는 또렷한 상상으로 탈바꿈한 찰나의 희열을 말이다. 내겐 어떤 보물창고보다도 값진 이 책을 홀린 듯 읽어 내려갔다. 나를 살릴 생각과 문장이 가득한 이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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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의 저자 수마나 로이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나무가 되고 싶다고. 이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비유이자 복잡한 사유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비추어볼 때 비유보단 평서문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그러니까 수마나는 진심으로 나무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무를 향한 그녀의 열망은 어찌 보면 광적이다. 남들은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나무와의 교감, 상상, 감각에 한평생을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와 식물의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친구를 졸랐던 일화에선 순수하도록 진중한 마음을 봤을 때의 웃음과 경외가 스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와 숲을 주제로 한 작가나 예술작품, 종교 등을 끈질기게 톺아보고 분석하면서 ‘나무적인 삶’을 세밀하게 직조한다.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는 나조차 그녀의 구체적인 마음과 행적들에 묘한 낯섦을 느낄 정도로.

 

열정의 대상이 나무라는 것이 생소할 수 있으나, 대부분의 주류가 소수가 가진 낯선 집착에서 퍼져나갔다는 걸 생각하면 지극히 자연스럽기도 하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 대부분 남모르게 집착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낯섦보다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은, 자기 세상에 강한 확신을 갖고 집착을 이어 나가는 용기 자체와 그러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시선이다. 나무를 자기 자신과 동료로 여겨온 수마나는 나무의 시선으로 인간 삶을 바라보게 된다.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삶을 먼발치 떨어진 관찰자의 시선으로 볼 때 알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생명체를 풍요롭게 가꾼 흔적인 나이테와 달리 문명사회에서 주름은 부끄러운 흔적으로 여겨진다.


선크림은 태양을 새하얀 켄버스에 어두운 황갈색을 끼얹는 고문 기술자로 둔갑시켜 버린다.  


식물의 경제학에서는 필요와 요구가 같은 개념이다. 그저 필요할 만큼 원할 뿐이다.


나무 그늘에는 낯선 특징도 보이지 않고 나무껍질이나 잎, 꽃과 열매의 색도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든 인종, 계급, 종교와 관계없이 똑같은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가 시각적으로 드러난 성적인 부분이 없다는 점도 내가 인간들보다는 나무와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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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문장들을 살펴보면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지금 시점에서 인간적이다는 말은 반자연적이다는 말과 동의어다. 사실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 중 정말 자연스러운, 자연에 가까운 건 얼마나 있을까. 


더함과 덜 함 없이, 별도의 구분 없이 나무는 다른 존재와 상생한다. 그들 역시 생물이라 생존경쟁에 놓일 때도 있지만 결코 승자독식의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수마나 역시 “식물에게 관용이 없다면 굳이 나무의 삶으로 도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녀의 나무적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은 수많은 욕망의 “꼬리표”로 점철된 인간적인 삶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강인한 선택처럼 보인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한 일원으로서의 ‘인간’으로 회복하고 싶다는 주체적인 포효처럼 들린다. 


그런 측면에서 수마나의 이야기는 한 권의 시처럼 느껴진다. 대상과 서술어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접목해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시. 사실 인류세의 시대에서 자연스러운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상상은 발칙하지 않다. 오히려 힘껏 지향해야 할 세상에 가깝다. 


더하여 그런 세상을 실현하는 필수적인 조건 역시 수마나의 이야기에 담겨있는데, 바로 체험이다.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단이 많아진 지금이지만, 피부를 통해 느끼는 경험은 무시할 수 없이 중요하다. 수마나는 인간문명이 지배한 공간 외에 숲속에서도 여러 감정과 행위를 피어 나갔다. 인간 문명의 공간에서조차 마주치는 나무와 식물에 관심을 갖고 가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에게 숲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공간이자 자아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녀가 몸으로써 알게 된 자연의 소중함은 나무가 되고 싶다는 욕망의 한 부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마음과는 별개로 몸소 체험된 감각과 그것을 용인하는 문화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 


일례로 나는 자연을 사랑하지만, 26년 만에 처음으로 햇빛을 피하지 않고 즐기는 법을 뉴질랜드 여행에서 알게 됐다. 평생을 살아온 한국은 끊임없이 문명화된 세상에 뛰어들길 원하고 그를 위해 자연을 포섭하고 착취하는 것이 모두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여기고 있는 듯하다. 자연에서 본질적이고 긍정적인 경험을 해본 적 없는 이들에게 자연을 아끼는 가치란 생겨날 수 없다.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인간과 자연 모두가 무시되는 세상에서 마주할 한계란 자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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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나의 자연주의적 사유와 행적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를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상당 부분 그녀와 비슷한 선대 사람들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에 할애되어있다. 실제로 그와 비슷한 욕망에서 시작한 사유와 예술작품의 양이 방대하다는 것은 놀라우며, 불교처럼 이미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가치라는 점도 전복적이다. 부지런하게 나무가 되고 싶었던 인간들의 행적을 찾는 과정에서 그녀의 세상이 더욱 오롯해지고 단단해짐이 느껴졌다. 

 

터무니없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당돌하고도 주체적인 모습은 큰 위로가 된다. 그건 결국 자기만의 허황한 세상을 바라고 그리는 이들을 향한 생생한 격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치열한 역사 속에서 표면에만 머물러 있는 내 생각의 근원을 탐색할 수 있었다. 

 

나는 왜 나무가 되고 싶은가. 나는 왜 상상하는가. 


그녀가 선사하는 고요한 숲속에서 자연적인 사유에 침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무가, 자연이, 내가 한 그루만큼 더 소중해졌다. 나의 정원이 한 뼘씩 풍요로워졌다 .


그녀의 이야기가 이 시대에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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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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