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일상을 숨 쉬는 폭력

글 입력 2024.02.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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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이야기


 

<채식주의자>라는 연작소설이 있다. 무언가 무해한 느낌의 제목을 가졌지만, 소설 속 인물은 제목과 완전히 상반된 주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소설은 놀랍게도 인간 삶에 녹아들어 있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내면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도사리고 있을까?’라는 상상도 못 한 질문에 한강 작가는 아래와 같은 답변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삶에는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의 온화한 폭력마저 가득하다고.

 

작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영혜’라는 인물을 끌어들인다.

 

영혜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에 이르는 연작소설을 이끄는 주인공이지만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나 다부지게 입을 다문 그녀의 얼굴 위로는 폭력이라는 주제 아래 고뇌하며 괴로워한 흔적이 서려 있다.

 

이제부터는 앞서 언급한 세 편의 소설 가운데 첫 번째 단편 <채식주의자>로 범위를 좁혀 그 안에서 언급된 폭력의 양상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1. 그녀가 이야기하는 첫 번째 폭력, '고기를 먹는 것'


 

소설 첫 페이지서부터 영혜는 고기를 비롯한 온갖 동물성 식품을 거부한다. 심지어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류마저 입지 않는다. 소설에서 끈질기게 언급되는 영혜의 꿈속 이야기 - 칼과 피, 공중에 매달린 차가운 고기의 분위기를 떠올리노라면 생명을 죽여 발생하는 온갖 부산물을 거부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혜가 떠올리는 고기의 이미지가 끔찍한 모습으로 각인된 원인은 단지 꿈에 있지않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있다. 소설을 여러 차례 읽어보면 영혜의 꿈만큼이나 끔찍하게 묘사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아버지가 영혜의 다리를 문 개를 처벌하는 장면이다.

 

영혜의 아버지는 개의 잘못을 벌하기 위해 그 개를 잡아다 오토바이에 묶은 뒤, 직접 차를 몰고 동네를 달렸다. 개는 오토바이의 속도를 따라서 달리고 달리다가 질질 끌려 죽어갔고, 그날 아버지는 죽은 개를 요리해 동네잔치를 벌였다. 한 생명이 그렇게 죽어서 요리가 되었다.

 

그날 영혜의 아버지는 그 개를 철저히 '갖고 놀았다'. 심지어는 그 개의 삶과 죽음까지 손아귀에 쥐고 놀았다. 속되지만 정직한 표현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한 생명을 마음껏 농락하다 죽였다. 오토바이 뒤에 개를 매달아 달리게 하다가 결국 질질 끌려가는 참혹한 모습을 온 동네에 보임으로써, 아버지는 개라는 존재를 단지 자신의 감정을 풀기 위한 놀잇감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개를 보며 웃거나 박수를 쳤을 테고, 혹은 불쌍해하기도 했겠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한 생명은 단순 대상화되었고 그 뒤에는 요리의 재료가 되어 죽었다.

 

누군가 원하는 대로 한 생명을 마음껏 갖고 놀다가 그의 죽음까지 손에 쥐었던 것. 하물며 대의를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분을 풀기 위함이었다는 것. 그리고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이유로, 참혹히 희롱당한 죽음은 인간의 식사로 식탁에 오르며 다시 모욕되고 말았던 것. 결국 개는 죽어가는 과정에서나, 죽은 이후에나 두 번 모독을 당한 것이 된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영혜의 마음속에는 '폭력을 사용해서 인간은 음식을 구하고, 살아간다'는 깨달음이 자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어느날 꾸게 된 꿈을 통해 다시금 상기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으로 하여금 '육식(혹은 관련한 것의 소비) = 폭력'이라는 강력한 문구가 그녀 마음 깊이 각인되었고, 결국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살아가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폭력이 결부됨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의 의지에 반하여 그들을 포획했고 숨을 빼앗은 뒤, 적절한 형태로 자르고 말리고 꿰었다. 대다수가 접하는 것은 말끔히 다듬어지고 난 이후의 죽음이더라도, 폭력의 한 갈래를 행하였다는 점에는 반박할 수 없다. 단지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유지하고, 더욱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2. 그녀가 이야기하는 두 번째 폭력, '애정의 표현'


 

이렇게 영혜의 식습관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진 ’폭력‘이라는 화두는 이후의 이야기에서도 재차 등장한다. 바로 영혜를 향한 애정으로 말미암은 가족들의 강압적인 태도에서다.

 

애정과 폭력은 사전적 의미로 보면 완전히 반대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밀접히 연관되곤 한다. 애정이라는 명목하에 어떤 폭력은 정당화되고, 도리어 부추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혜의 가족 모임이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오래간만의 가족 모임에서조차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에게 가족들은 거듭 고기를 권하지만, 그들의 재촉에 시달리다 못한 영혜는 겨우 한 마디 내뱉고 만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여 사위와 아들로 하여금 억지로 영혜를 붙잡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영혜가 입을 다물고 완강히 고기를 거부하자, 아버지로 억지로 입술을 비집고 입 안으로 고기를 들이밀었다. 결국 영혜의 입에 고기가 들어가고 말았고, 그녀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칼로 자신을 해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이 장면에서 의아했던 점은 가족들이 영혜에게 보이는 태도에 있었다. 그들은 애초에 영혜의 뜻을 듣고 수용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저 그녀를 달래어 고기를 먹게 할 계획뿐이었다. 그러다 예상과 반대되는 영혜의 행동에 알량한 인내심을 포기해버리고 만 것이다. 즉, 그들의 세상에는 자신들만의 논리만 자리하고 있던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논리가 옳기 때문에 영혜는 자신들의 뜻대로 따르게끔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영혜의 생각이 어떠하든 간에.

 

즉, 가족들이 영혜를 온갖 말로 나무라다 못해 강압과 강제를 사용하기까지에 이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영혜에게 있지 않았다. 오히려 영혜를 이해하려는 태도 부족 때문이었다. 나는 이러한 태도 또한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이 지닌 생각을 배척하거나 고치려는 태도 그 자체가 폭력성을 띄기도 한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힘과 권력의 논리를 이용해 상대를 찍어내려 순응시키려는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들이 영혜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할지언정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면 상황은 나았을 것이다. 영혜라는 개인의 뜻이 침해되지 않고 고유한 바운더리를 존중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혜의 거부가 못마땅했던 가족들은 애정이라는 명목으로 영혜를 그들의 방식대로 고치려고 시도했으나, 그 결과 영혜는 더 큰 폭력을 자신에게 행하고 말았다. 그토록 폭력성을 거부하던 영혜가 도리어 폭력을 수단으로 취해서라도 가족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던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영혜에게 그날의 사건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인간이 지닌 폭력성을 실감하게 함과 동시에, 그러한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큰 폭력만이 저항의 수단이 된다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했다. 또한 그날의 자해를 통해, 폭력이 자신의 내면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는 혼란스러움은 오직 그녀만의 것으로 남게 되었다. 그녀는 또다시 고립되고 말았다. 그 폭력의 굴레 속에서 영혜라는 인간은 결국 포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결과를 통해, 폭력과 애정은 매우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혜를 아끼는 마음은 지나친 간섭의 원인이 되었고, 더 나은 방향으로 그녀를 이끌고자 하는 뜻은 힘으로 제압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고집으로 표출된 것이다.

 

 

 

3. 맺는 이야기


 

이후로도 남은 두 편의 소설이 마무리되기까지 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영혜가 고집하는 것은 일관된다. 고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부산물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폭력을 자신의 삶에서 몰아내는 과정에서마저 그녀는 비폭력성을 유지한다. 타인에게 뜻을 함께하자고 종용하지도, 누군가를 탓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지닌 삶의 방식을 묵묵히 바꾸어갈 뿐이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보이는 것은 비폭력을 향한 처절한 시도였다.

 

<채식주의자>를 읽기 전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사소한 강압이나 폭력까지도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사람만을 곁에 두겠다‘라고 다짐하곤 했다. 요컨대 ’폭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접한 <채식주의자>는 그러한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주었다. <채식주의자>에서는 다양한 형태와 명목으로 폭력은 우리 삶에 녹아있고, 우리가 인지할 새도 없이 자연스레 발현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의 생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필연적으로 결부될 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가해지기도 한다니. 나의 삶과 먼 것으로만 여겨지던 폭력이 알고 보니 이미 내 안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내 인정하게 되었다. 그간 내가 이해했던 폭력의 범위가 제한적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게 남은 과제는 내 삶에서 폭력을 어떻게 다루어내냐는 문제이다. 설령 내가 깨닫지 못한 종류의 폭력이 있다고 한들, 내가 인지한 폭력의 범위 한에서는 가능한 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을 실제 일상에 적용하는 데에는 여전히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부끄럽게도,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영혜처럼 모든 폭력을 배제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할 수 없다. 대신 나 또한 하나의 생명이고, 매일 마주하는 상대도 자기만의 삶이 있는 오롯한 생명임을 상기한다. 내가 내뱉는 말과 행동 속에 어렴풋이 서려 있는 날선 감정을 들여다본다. 이렇게 나의 매일에 귀 기울이며 중간점을 찾아나가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서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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