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구적 거리로 가까워지기 - 우리에게 남은 시간

최평순, 『우리에게 남은 시간』(해나무, 2023)
글 입력 2023.12.1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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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그날을 분명히 기억했다. 고속도로 어느 휴게소에서, 케첩을 야무지게 바른 핫바를 먹으면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한탄을 내뱉었던 날. 어정쩡하게 서서 뉴스를 보다가 일행의 재촉으로 서둘러 다시 차에 몸을 실었던 날. 기지개를 한번 펴서 순간의 개운함을 만끽했던 날. 엄습하던 어떤 불안과 두려움이 다 먹고 버려진 핫바 꼬치처럼 이내 휴게소 한 구석에 버려졌던 그날을 기억했다. 2019년 가을의 일이었다.


환경 파괴로 몸부림치는 지구를 목격하면서도 우리는 평온했다. 일말의 불안감은 일상의 평화 앞에서 금세 누그러졌고, 우리는 평소처럼 가장 편리한 방식을 찾아서 평범하게 지구를 파괴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무자비하게 당겨쓰면서, 눈앞에 육박해오는 최후를 쉽게 외면하면서. 우리가 무책임하게 당겨쓰던 시간에 ‘인류세’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하게 불어나는 그 빚을 가리키는 이들의 성실하고 위대한 작업이 있다.


환경 전문 PD 최평순의 『우리에게 남은 시간』(해나무, 2023)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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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평순 PD는 먼저 전문가의 의견을 빌려 인류의 활동이 지구 시스템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며 파괴하는 지질시대, 인류세에 대한 무관심 원인을 진단한다. 인류세는 심각한 생존의 문제이나 사회적 힘을 얻지 못한 과학적 용어들, 과학 지식을 사용하는 국가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부족, 위기에 대한 심리적 저항과 회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등으로 그 심각성이 조용히 묻혀 있다. 진단은 정확하지만,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다. 모든 정보가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퍼지는 시대. 이런 기술의 시대 속 무지의 원인은 사실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인식의 부재다. 실천은 인식의 확립 이후의 일이다. 인류는 환경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생산하지 못한 채 인류세에 머물고 있다.


견딜 수 없는 사람의 글에는 어떤 조급함이 묻어난다. ‘시간이 없어’, ‘당장 바뀌어야 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시종일관 우리를 다그친다. 그러나 환경을 위해 우직하게 활동해왔던 저자의 그 조급함은 경망스럽지 않고, 오직 진실해 보인다.


 
인류세의 인지도가 전무한 수준일 때부터 지금까지 인류세 공론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무관심이라는 벽과 싸우는 중이다. 방송도, 책도, 전시도, 세계 최초의 인류세 단일연구기관이 내놓은 논문도 이 사회의 주변부에서만 머물고 있다. 기후 위기,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과 확산, 플라스틱 쓰레기의 범람 등 인류세 현상은 뚜렷해지지만, 공론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다른 것들이다. 생각할수록 더 답답하다. 다수 사람들에게 인류세와 같은 지구적 문제는 대체 왜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걸까? p.23
 


시간이 촉박하고, 문제가 심각하다. 개인적 차원에서 행하는 환경 보호 활동이나 착한 소비자 운동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이런 단언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이렇게 단언하는 순간, 작은 행동으로 가리며 안심하려 했던 우리의 방어기제를 뚫고 거대한 진실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엄정한 현실감각이 육박해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류세 문제에 대한 통계적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정확한 숫자를 줄줄이 나열하면서 심각성을 설명해도 직관적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일 테다. 해양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을 수준인 바닷물 수소이온농도의 변화 수치는 겨우 pH 0.3~0.5 정도이다. 자연스럽게 ‘겨우’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숫자는 똑똑하고 강하지만, 그만큼 거리가 멀다. 숫자로 문명을 일군 인류는 숫자 뒤에 숨어 무지하게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다. 스스로만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을 무너뜨리고 있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파괴적 결과에 오히려 무관심한 인류의 폭력적 행태. 진단과 팩트 체크를 마친 후 저자는 전문가 의견을 중심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읽어 나가면서도 어쩐지 힘이 솟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인류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전 지구적 의지를 모으고 실천하는 “그런 움직임을 느긋하게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86쪽)


자유라는 명목으로 지구 위에 너무 많은 생각의 가지들이 난립했다. 단일한 인식으로 묶기엔 복잡하고, 단칼에 잘라내기엔 엄살과 비명이 난무한다. 몇몇의 노력으로 감당하기에 인류세의 재앙은 이미 너무 거대하다. 인류세는 인류가 지구에게 선물 받은 시간과 공간이(世) 아니라, 지구가 인류에게 부과한 엄중한 세금(稅)이다. 전 지구적 징수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오늘 우리 눈앞의 평화는 거짓이다. 지구는 인류의 반성을 무한히 기다려주지 않는다. 인류세를 벗어날 방법을 찾는 사람들, 그들의 아우성에 우리는 기꺼이 많은 힘을 보태야 한다.


읽어도 아득히 멀다. 그러므로 더욱 자주, 많이 읽어야 하리라. 그래야만 개인적 차원에서 지구적 거리로 한 발, 가까워질 수 있으므로.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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