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잘 쓰여진 소설은 오래 사랑받는다 [도서/문학]

구병모 <파과>
글 입력 2023.10.0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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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일하다 보면 사람들이 많이 빌리는 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정 시기에 많이 대출되는 책도 있고(챗 GPT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한동안 인공지능 서적이 많이 대출됐다), 꾸준히 많은 사람들이 빌려 가는 책이 있다. 구병모의 <파과>는 후자에 속했다. 매주 다른 사람이 분홍색과 주황색이 섞인 그 책을 빌려 갔고, 책이 반납된 다음에는 기다렸다는 듯 다음 예약자가 책을 가지러 왔다.

 

대체 어떤 책이길래 이토록 꾸준히 사랑을 받는 걸까? 나 또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파과>를 기다리는 긴 예약줄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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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는 60대 킬러 ‘조각’의 이야기다. 여성 킬러라는 것도 흔치 않은데, 거기다 현역 활동을 하는 60대 노인이라니 정말이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다. 그녀는 그녀를 가르친 스승을 가끔 떠올리며, 집에 함께 사는 유기견을 돌보며 평범한 킬러의 삶을 산다. 의뢰가 들어오면 누구든 죽이고 평상시엔 웬만해선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삶의 방식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일상에 무언가 다른 것이 들이찬다. 완벽한 킬러인 그녀가 한 젊은 의사에게 정체를 들켰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조각은 그 의사와 부모, 그리고 그의 딸 주변을 기웃거리며 낯설고 애틋한 마음을 싹틔우게 된다. 그리고, 도미노처럼 조각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저 가볍게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나는 앉은 자리에서 <파과>의 마지막 문장까지 해치워 버렸다. <파과>는 내 예상보다도 더 엄청난 책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말하자면 문장이 엄청났다. 작가 구병모는 ‘짧은 문장만이 좋은 문장이다’는 가르침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다고 과거를 회상하곤 한다던데, 그 말을 증명하듯 <파과> 속 모든 문장은 놀랄 만큼이나 길다. 보통이면 10줄 내외로 채울만한 페이지를, 구병모는 고작 4문장으로 채우는 능력이 있다.

 

나는 문장의 시작부터 수많은 접속사와 단어를 지나 몇 줄에 걸친 문장이 끝나는 순간까지 숨을 참으며 책에 몰입하곤 했다. 마치 서예를 할 때, 선이 휘어지거나 바들거리지 않도록 숨을 참는 것과 비슷하다. 그의 문장은 그럴만한 무게가 있었다.

 

*

 

형식이 아닌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먼저 파과의 정의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파과破果는 흠집이 나 망가진 과일을 말한다. 과즙으로 가득 찬 과일은 한 입 베어 물면 달디단 과즙이 망가지듯 터져 나와 손이 쉽사리 더러워진다. 혹은,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해 안에서부터 문드러져 썩어가기도 한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 p.225

 

작품을 읽기 전에는 이 소설의 제목이 무슨 뜻을 품고 있을지 참 궁금했다. 흔히 쓰는 단어가 아닐뿐더러 뜻도 직접 소설의 표면적 요소와 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는, ‘파과’에서 말하는 과일이 마치 조각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망가진 과일은 단지 육체의 노화를 겪는 조각의 정체성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조각의 내면, 혹은 캐릭터 그 자체와 닮았다고 느껴졌다. 더불어 작품 내에 나오는 조각의 후배 ‘투우’ 또한 떠올릴 수 있었다.

 

우선, 그 이유를 설명해 보자면 젊은 시절 조각이 그의 스승 ‘류’를 떳떳하게 바라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조각은 부인도 아이도 있는 그를 마음에 품었기 때문에, 한평생 죄를 지은 것과 같이 류를 눈에 담는다.

 

그러다 류의 부인에게 일이 생기자, 조각은 그녀에게 사고가 발생하는 순간을 내심 상상해 보았던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하면서도 욕망과 책임에 따라 류의 곁에 남는다. 젊은 조각의 마음도, 60대가 된 지금 류를 회상하는 조각의 마음도 단연코 복잡미묘하다. 어디서부터 썩어버렸는지 알 수 없어 손을 쓰기 늦어버린 과일과 같다.

 

조각의 후배 투우도 문드러진 과일이기는 마찬가지다. 어렸을 적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집착적으로 따라다니는 그는, 원수의 주변을 빙빙 겉돌며 자신을 위한 일그러진 모성을 찾는 듯하다. 그의 집착은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제대로 정의할 수조차 없다. 분노와 애착, 증오와 애정, 그리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한데 모여 검게 썩는다.

 

결국 <파과>는 망가지고 복잡한 감정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캐릭터들은 구병모 작가의 수려한 문장 속에서 살아나고, 자신들의 절정을 향해 달린다. 독자는 책을 편 이상 그들의 죽고 죽이는 이야기와, 욕심과 욕망이 얽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잠자코 따라갈 수밖에 없다.

 

꾸준히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랑받는다. 그리고 구병모의 <파과>가 가지는 매력은 놀랄 만큼 멋진 문장, 뒤로 갈수록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치밀한 구성, 매력적인 캐릭터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파과>를 기다리는 예약자의 목록에 이름을 써넣는 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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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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