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치밀한 계획, 우직한 끈기, 그리고 행운 한 스푼의 화합물 - 분자 조각가들

글 입력 2023.05.1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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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갑자기 찾아온 심각한 복통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수준의 고통에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한 채 '죽을 만큼 아프다'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었다. 정신없이 집에 있던 진통제 두 알을 삼키고 인고의 시간을 보내니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최근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고통이 심했던 탓일까. 매일 삼키면 끝이었던 약인데 처음으로 만든 이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을 알린 백승만 교수의 신간 <분자 조각가들>이 나왔다. 저자는 스스로를 '분자 조각가'라고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술가가 부드러운 흙을 덧붙이고 깎아내길 반복해 하나의 조각상을 완성하는 것처럼 화학자들은 여러 원자를 붙이거나 제거하며 목표에 부합하는 화합물, 즉, 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래도 본질은 비슷하다. 미켈란젤로가 최고의 원석을 고르기 위해 로마 근교의 대리석 산지를 돌아다니고 잘 손질한 조각 기구와 함께 작업장에 들어선 것처럼, 나는 좋은 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시약 회사 홈페이지를 돌아다니고 플라스크와 시약을 가지고 실험대 앞에 선다. 그리고 하루하루 열심히 분자를 다듬는다. 나는 분자 조각가다.

 


이제는 편의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타이레놀이나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코로나19 백신까지.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는 이 약들은 익숙한 만큼 무관심했던 영역이었다. <분자 조각가들>에서는 그 작고 동그란 약 뒤에 숨어 있던 화학자의 노고와 역사를 소개한다.

 

*

 

고등학교 졸업 이후, 과학과는 담쌓고 지냈던 문과계열 전공자로선 책의 내용이 참 낯설었다. 그렇기에 전문적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만 치중했더라면 이 책은 이미 라면 받침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자 조각가들"에 담긴 이야기들은 낯선 동시에 상당히 흥미로웠다. 비전공자에게는 익숙지 않은 내용에서도 누구나 공감할 공통분모를 찾고 스토리텔링하는 저자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다.

 

약을 만드는 일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화학자들은 하나의 약을 만들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때때론 단순한 우연 하나로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되는 경험을 한다. 일례로, 퍼킨은 말라리아에 치료 효과를 가진 퀴닌을 합성해 보고자 실험을 시작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 속에서 수많은 시도를 하다 발견한 것이 보라색 물질이었다.

 

  

퍼킨은 열심히 연구했다. 온도, 시약, 용매, 나중에는 출발 물질까지 바꿔가면서 퀴닌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 실패만 반복했다. 그러던 중 퍼킨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합성이 안 되는 건 똑같다. 안 되면 다시 해야 한다. 그러려면 플라스크부터 씻어야 한다. 플라스크는 소중하니까. 그런데 플라스크를 다시 쓰기 위해 안에 있던 내용물을 씻던 중 퍼킨은 뜻밖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우연히 플라스크에 응고된 보라색 물질을 그냥 버릴 수도 있었지만 퍼킨은 그 대신 이를 정제해 보랏빛을 내는 염료 '모베인'으로 발전시킨다. 염료가 희귀했던 시절, 보라색을 내기 위해 사용되던 비싼 천연염료 대신 대량 생산이 가능한 모베인은 큰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훗날 이 염료는 옷감뿐만 아니라 기생충을 염색하는 데에 쓰였고 더 먼 미래에서는 매독 치료제인 살바르산의 개발로 이어졌다. 우연히 발견한 보라색 염료의 나비 효과가 참으로 대단했다.

 

한편으로는, 화학자에게 찾아온 우연 혹은 행운처럼 보이는 것들 또한 수많은 노력과 실패가 있었기에 그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퍼킨이 퀴닌을 합성하는 건 얼토당토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혹은 몇 번 시도하다가 금세 포기하고 실험을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보라색 물질을 아예 구경조차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끊임없이 시도하는 우직함과 플라스크 속 새로운 찌꺼기를 그냥 넘기지 않는 주의력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매독 치료제가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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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퍼킨을 포함한 여러 과학자들의 계획, 노력, 그리고 우연이 더해져 수많은 약이 탄생했다. 그 덕분에 과거엔 죽을 만큼 위중한 병도 이젠 며칠 앓고 나면 금방 괜찮아질 수 있는 간단한 질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확한 치료제를 발견하지 못한 질병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어 강한 진통제에 의존한 채로 연명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존재를 알기에 책을 읽는 내내 감사한 마음이 드는 한편 조급함도 들었다. 지금보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분자 조각에 관심을 갖고, 하루빨리 이들을 위한 분자 조각을 발견하길 바라는 조급함이다.

 

책의 표지에서는 이 책을 '의약대 및 간호대 학생들을 위한 추천도서'로 소개하고 있다. 앞으로 약, 그리고 환자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할 이들이니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대학생보다 중학생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여러 가능성을 탐색하고 앞으로의 꿈을 고민하는 첫 단계에 서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문과 계열을 전공했고 그 누구보다 전공에 만족하며 살아온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중학생 때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만큼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화학자란 직업의 매력을 느껴볼 수 있는 책이었다.

 

똑같이 무언가를 조각하지만 예술가와 달리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무르는 이들. 그럼에도 세계를 변화할 수 있을 대단하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 분자를 조각하는 이 직업에 대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여러 직업 중 이러한 선택지도 있음을 고려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매일 손 닿는 곳에 있기에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약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책과 저자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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