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이름을 너에게 가둬야지 [영화]

이름을 바꾸는 것에 관한 생각.
글 입력 2023.03.2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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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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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으로 널 거기(정신병원에) 가둬 놓고

난 네가 돼서 멀리 달아나려 했어.”

 

 

아가씨의 이 대사를 듣고 나서 문득 의문이 생겼다. 왜 퀴어들은 서로의 이름을 가지고 싶어 할까?

 

<아가씨>에서 히데코는 숙희의 이름을 빼앗아 자유의 몸이 되어 후지와라 백작과 함께 떠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니까 원래 계획대로라면 히데코는 숙희가 되어, 평생 숙희로 살아갈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숙희가 된 뒤에도 히데코는 후지와라 백작을 벗어나 홀로 살 것 같다.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르겠다’는 것은 결국 나를 억압하던 속박의 굴레를 벗어 버리겠다는 뜻이다. 코우즈키의 은구슬 매, 지하실의 존재와 같이 처음 태어날 때부터 나를 힘들게 하고 나는 넘어서지 못했던 장벽이자 상징과도 같은 것들을 너에게 선사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숙희는 코우즈키의 매에도 전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눈빛과 성질을 가졌다. 그게 히데코가 그를 믿을 수 있는 이유였을 것이다. 어리숙한 얼굴을 해도.

 

결국 히데코는 숙희와 함께할 것을 택했고, 그렇기에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원래의 계획이 이루어졌을 경우를 생각해본다. 과연 아가씨는 남숙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자유로웠을까? 잠시나마 바보같이 자신을 사랑해줬던 어리숙한 종년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리지는 않았을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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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오, 엘리오, 엘리오, 엘리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름 바꾸기’라는 소재의 정수 같은 영화다. 최근의 퀴어 문화적 소스가 많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릴 나스 엑스의 ‘MONTERO’가 이 영화의 제목을 부제로 달지 않았다면 과연 이만큼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의 성 소수자성을 직시할 수 있었을까? 어떤 사람은 노골적인 퀴어의 관계 역시 쉽게 우정으로 포장하니 말이다.

 

아무튼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니,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는 엘리오와 올리버의 마지막 통화를 보며 이름을 바꾸는 것이 결국 많은 걸 가질 수 없는 80년대 게이 소년의 작은 반항이라는 생각을 했다. 둘은 사랑했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올리버는 결혼하고, 부모님은 올리버와 엘리오의 관계를 ‘아주 특별한 우정’ 정도로 취급하고 넘어가 준다. (어떻게 이 결말이 아름답냔 말이다)

 

엘리오는 올리버와의 이별을 직감한 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끝없이 부른다. 온전히 자신의 연인인 것 같았던 올리버를 가지기 위해 했던 약속.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시간은 두 사람의 것이 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서로가 전화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허무한 일이라는 것. 엘리오는 연인도 연인과의 시간도 자신의 굳건했던 세계도 잃어버렸다. 엘리오가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부를 날이 올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는 자신의 이름은 사용하지 않을까?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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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 기억나? 넌 아휘야. 난 하보영이고.

왜 여권을 안 돌려주는지 알아?

네 이름을 평생 간직하고 싶었어.

내 이름을 써도 돼.

그러면 하보영이란 세 글자를 평생 잊지 못하겠지.”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는 왕가위 감독이 그린 퀴어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해피투게더>의 스핀오프이자 코멘터리 정도 되는 이야기이다. <해피투게더>만 봐도 충분히 아휘와 보영의 사랑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래서 이 코멘터리를 보면 보영과 아휘라는 캐릭터가 마치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실존 인물처럼 느껴진다.

 

<해피투게더>에서도 아휘가 보영의 여권을 훔쳐 숨겨 놓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아휘가 보영의 여권을 가져가 돌려주지 않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그의 사랑과 집착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영화의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본 영화에서는 아휘가 보영의 여권을 가져가 돌려주지 않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그의 사랑과 집착을 어렴풋이 짐작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에서는 아휘가 보영의 여권에 어떤 의미까지 부여하는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것도 아휘 본인의 입을 통해. '난 너를 평생 잊지 않을 거야.' 좀처럼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연인에 대한 원망, 증오, 미련과 그 속에 일부 숨어있는 애정을 이기지 못해 아휘는 보영의 여권을 빼앗아 버린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법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와(비공식적으로 <해피투게더>는 전체 촬영분의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섬세한 설명이 이 코멘터리에 밀도 있게 존재한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아휘가 ‘보영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는 나레이션과 함께, 낡은 식탁에 놓인 보영의 여권과, 아휘의 양 손목에서 나와 주위를 천천히 흐르는 붉은 피의 이미지가 나온다. 그래서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상대를 갖지 못한 한을 바탕으로, 타인의 이름을 빼앗는 행위는 자기 파멸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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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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