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생의 허무와 파괴적 대립 속에서 허우적대는 대척점 위의 두 남자 [영화]

마틴 맥도나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글 입력 2023.03.2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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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1923년, 고요하고 아름다운 아일랜드의 한 외딴섬 ‘이니셰린’. 이니셰린에 사는 ‘파우릭(콜린 패럴 분)’은 여느 날처럼 한가로이 걸어서 절친한 친구 ‘콜름(브렌단 글리슨 분)’의 집을 찾았다. 파우릭은 문을 두드렸음에도 아무 응답이 없는 콜름을 보고 의아하게 느끼지만, 먼저 술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그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예상대로 콜름 역시 술집에 찾아오지만 계속해서 파우릭을 무시하는 눈치다. 어제까지만 해도 둘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 없었기에, 파우릭은 계속해서 콜름과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갑다. 두 절친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궁금증을 자아내며 두 사람 간의 영문 모를 전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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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릭은 현재 인생 최대의 난제 앞에 놓여있다. 이니셰린의 주민 모두가 파우릭 하면 콜름, 콜름 하면 파우릭을 떠올릴 정도로 둘은 항상 붙어 다니는 돈독한 절친 사이였다. 까닭도 모른 채 가까운 이에게 갑작스레 무시당하게 된 파우릭은 답답하다 못해 미칠 지경이다. 소중한 친구가 하루아침에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파우릭이 아닌 그 누구라도 그랬을 듯하다.


여러 번의 무응답에도 파우릭은 굴하지 않는다. 혹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거나,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콜름은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포기하지 않은 채 끝까지 이유를 알아내려고 집착하는 파우릭에게 콜름이 마침내 내놓은 답변은 매우 뜻밖의 것이었다. ‘그냥 갑자기 네가 싫어졌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소통의 단절과 콜름의 답변에 파우릭은 안절부절못한다. 술집을 드나들며 주민들에게 콜름의 사정을 묻기도 하고, 여동생 ‘시오반’ 그리고 소위 ‘동네 바보’라고 불리는 소년 ‘도미닉’에게까지 답답한 속내를 모두 털어놓는다.


“콜름은 똑똑하지만 파우릭은 그와 거리가 멀고, 사실 잘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지.” 술집 사람들이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이를 쉬이 인정하지 못하는 파우릭은 콜름의 입으로 직접 자신이 싫어진 진짜 이유를 듣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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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의 마을에서 파우릭이 시오반 외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콜름밖에 없었기에,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우정을 나눈 소중한 존재를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매일이 반복되는 지루한 섬 생활 속, 파우릭은 절친과 함께 술집에서 마시고 노래 부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제외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전과 같은 태도로 대하는 콜름을 보면서, 파우릭은 더욱 끈질기게 절교의 까닭을 알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수없는 물음 끝에 돌아온 답은 더 이상 말을 걸고 귀찮게 하거나 침묵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내겠다는 콜름의 매서운 위협이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곡을 쓰는 것이 일상인 음악인 콜름이 본인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말한 것은 그의 단호하고 결연한 결심을 나타내는 증표다.


눈썹이 축 처진 채 서글픈 얼굴로 애걸복걸하던 파우릭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자신이 없어져야만 한 줌의 평온을 가질 수 있다며 모욕적인 말을 뱉어내는 콜름에게 분노하고 달려들기 시작한다. 폭력적인 콜름의 위협 덕택에 파우릭이 키우던 당나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두 사람 간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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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름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 후로부터 작중 시간이 꽤 지난 뒤에야 밝혀지는 진짜 이유는 영화의 주제 의식을 상징하고 있다. 콜름은 삶의 여전함과 무의미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노인인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그는 생의 남은 시간 동안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족적과 같은 자신의 음악을 반드시 완성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런 콜름에게 매사 여유롭고 사람들과 웃고 떠들기 바쁘며, 인생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즐거워하기 일쑤였던 파우릭은 단호하게 끊어내야만 했던 존재다. 두 사람은 술 동무로서 생각과 대화가 잘 통했을지는 몰라도, 그들 각자의 타고난 성정과 삶의 지향점은 정반대의 대척점에 위치해 있었던 인물들이다.


‘따뜻한 관계 속의 다정함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 아니냐’고 말하는 파우릭을 콜름은 ‘다정함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며 받아친다. 한 세기를 대표하는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위대한 음악 혹은 예술 작품은 모두가 길이길이 기억하고 간직하지만 다정함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며 교훈한다.


예술의 가치와 다정한 관계의 지속. 단어만 얼핏 봤을 때는 둘의 공존이 충분히 가능해 보이기도 하지만, 인생은 수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삶의 궤적, 관계, 추구 가치, 방향과 지향, 시공간, 그리고 죽음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존재이기에 어느 때는 그 공존이 말처럼 쉽지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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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내전이 끝날 기미 없이 길게 이어지고 있는 작중 상황 속, 평화롭고 고요한 외딴섬에도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는 드리운다. 정적을 깨는 폭발음과 수없는 죽음이 섬마을을 둘러싸고, 어쩌면 이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참혹한 전쟁은 개인의 일상을 헤집어 놓는다. 이러한 점에서 내전 그리고 파우릭과 콜름 간의 다툼은 많은 부분 닮아 있다.


전쟁에는 상실, 죽음, 단절, 그리고 고립이 만연하다. 관계에도, 인생에도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만연하다. 단절과 고립이 불러오는 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한 사람은 순수함과 다정함을 무기로 관계를 꾀하고 다른 이는 위대한 업적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만, 끝을 모르는 파괴적인 대립은 그 모든 시도를 폐허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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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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