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해를 요구하는 말들

언어가 머금은 수호의 힘
글 입력 2023.02.2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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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점차 이해해야 하는 말의 가짓수를 떠올려본다. 사람은 옹알이만으로 의사 표현하는 시절을 지나 더 또렷하고 다양한 형태의 말을 배운다. 더 많은 존재와 풍부한 소통을 하기 위해 언어의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상상할 수 있는 크기를 키우는 것과 같은데, 상상의 크기를 키운다는 건 인식하고 신경 쓰는 대상의 범주를 늘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우’를 모르는 이가 ‘여우의 멸종’을 떠올리고, 아픔에 공감하고, 적절한 자기 행동을 결정하기란 어렵듯이 말이다. 따라서 언어는 단순히 말에서 말로만 전수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어떤 대상을 여러 감각으로 체험하고 직접 연결되는 연대감 역시 언어 성장의 촉매제다.


대부분의 신체처럼 언어는 탄생부터 청소년기 사이 집약적인 성장을 이룬다. 언어를 통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존재를 보여주는 책임은 어른에게 있다. 학교와 가정 사이 모든 곳에서 말이다.

 

불행히도 이에 역행하는 흐름이 교육을 책임지는 곳에서조차 발생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 의회 교육전문위원실이, 서울시 교육청에 서울특별시의 모든 교육 당사자에게 적용되는 조례안 검토를 의뢰한 바 있다. 정확한 이름은 <서울특별시교육청 학교 구성원 성·생명윤리 규범 조례안>이다.

 


[크기변환]화면 캡처 2023-02-25 193925.png

<네이버>에 '서울특별시교육청 학교 구성원 성·생명윤리 규범 조례안'을 검색한 화면

 


해당 안은 ‘성관계는 혼인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내용을 위주로 사회에 알려져 반발의 목소리를 샀다. ‘성’에 관한 담론을 죄악시하고 음지로 밀어 넣는 한국의 낡은 성 관념을 고스란히 반영한 내용이 논란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와 달리, 혼전 섹스로 대표되는 성적 실천의 자유가 ‘이해를 요구하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적 실천의 자유는 누군가가 침해해서는 안 되는, 더 이상 논쟁을 통해 왈가불가할 필요 없이 지켜져야 하는 개념이다. 그것을 믿지 않는 이들이 배우고 이해하고 따를 것을 ‘요구하는 언어’가 된 것이다.


이것은 시간에 따라 자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성’과 관련한 담론을 삭제하고 음지화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새로운 말을 발견하고 발명한 언어 투쟁의 산물이다. 관련한 언어가 풍부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성평등을 실천하는 감정과 방법을 배우고 실현해가고 있다.


나는 아직 사회가 환히 조명하지 않은 언어를 같은 조례안에서 발견한다. 앞선 사례와는 달리 별다른 이상함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큰 항목일 것이다,


 

‘혼인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정신적, 육체적 연합을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은 개인의 불변적인 성별을 의미하고, 이는 생식기와 성염색체에 의해서만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이외에도 더 많은 차별적 조항이 존재한다)

 


이 조항들은 성평등과 더불어 명확히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고 위협하는 언어다. 혼인이라는 법적 관계로 묶일 수 있는 다양한 관계를 지우고, 남성과 여성이 불변적인 사실이 아니라 관념적인 개념임을 외면하며, 생식기와 성염색체 외에 신체 형성에 관여하는 여러 요소와 작용, 그 복잡한 결합의 다양한 결과를 무시하는 말이다.


우리가 성적 실천의 자유를 이해하고 소중하게 여기듯이, 이미 많은 나라에서 앞선 두 조항에 관한 논의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소수자로 일컬어지는 다양한 개인, 다양한 개인의 다양한 조합이 점점 ‘이해를 요구하는 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느리지만, 한국에도 그 가치를 받아들이고 확장하기 위해 애쓰는 각고의 노력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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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한 사례로, 지난 21일 동성 커플 소성욱 씨와 김용민 씨는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빼앗긴 피부양자 자격을 항소 끝에 돌려받았다. 성소수자의 권리와 목숨이 박탈당한 소식만이 만연한 가뭄 속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재판부는 4대 보험 중 유일하게 배우자 요건에 사실혼 관계를 포함하지 않는 건강보험에 대해 성소수자를 포용했다. 현행법이 허용하는 선 안에서 성소수자의 법적 지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비록 동성혼으로의 확장엔 선을 그었지만, 분명 의미 있는 변화의 걸음이다.


논리 싸움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성소수자 의제가 사실 ‘사회적 관용’의 영역이었음을 명확히 밝히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찬성과 반대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할 영역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회적 차별을 개선해야 할 문제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할 판결이지만, 성소수자와 성평등을 위한 언어가 분명히 쌓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점점 이해해야 하는 언어가 되고 있음을, 그 과정엔 부지런히 사랑과 분노를 실천하는 이들이 있음 역시도. 그런 '우리들' 덕분에 건강보험 피부양자를 넘어 교육, 노동, 여가, 결합 등 생활 전반에서 성차별 없는 평등의 언어가 넘실거릴 미래를 그려본다.

 

20여 년이면 큰 틀의 성장을 마무리하는 신체와 달리 언어는 성장의 한계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사실과 존재가 발견되고 발명되기 때문에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언어 성장을 위한 시간에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언어의 근육을 키우는 것은 단순히 타인을 위한 봉사적인 행위만이 아니다. 넓은 언어의 울타리 속에서 나를 설명하고 지킬 자원을 마련하는 일이고, 그것이 타인을 지키고 그 타인이 다시 나를 지키는 수호의 연속이다.

 

당신은 어떤 수호의 언어를 갖고 있는가. 그 언어를 잃지 않고 우리와 나눠주길 바란다. 부디 기꺼운 이웃이 되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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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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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디그닥
    • 심도있는 글 잘봤습니다~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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